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5)
룽 키 리: 1만달러 상당 인두세 낸 마지막 중국노동자 향년 107세


Ralph Lung Kee Lee 1900-2007
23년에는 가족결합도 못하게 특별배척법까지 제정
백인들 대륙횡단 철도 건설 끝나자 ‘유 고 홈’ 여론



1788년 존 미어스 선장은 중국에서 50명의 ‘장인’들을 선원으로 고용, 브리티쉬 컬럼비아에 도착했다. 이것이 중국인 집단내방의 첫 사례로 꼽힌다. 이들은 상륙 후 물물교환소를 지었고 최초의 유럽식 선박 노스웨스트 어메리카 호 제작에 동원됐다. 두 번째 유입은 1858년 서부에서 금광이 발견됐을 때다. 캘리포니아에 살던 중국인들은 일확천금을 꿈꾸고 몰려왔다. 이들은 캐나다를 ‘금산(골드 마운틴)’이라고 불렀다.

캐나다가 연방국가가 된 후 서부지역까지 기차를 놓을 필요성이 높아졌다. 초대 총리 존 맥도날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선택은 중국인 노동자들을 데려 오든지 철도 건설을 포기하든지 둘 중 하나다. 다른 선택은 없다.”고. 이래서 1만5천 여 명의 중국인이 CPR철도 건설에 고용됐다. 이중 1천여명이 공사사고 등으로 죽었다. 1885년 철도건설이 완성되자 총리는 이들의 공헌을 인정, 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들이 아니었다면 일을 계획대로 끝내지 못했을 것이고 서부지역의 자원은 개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완공 후 중국인들에 대한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써먹을 데가 없어진 것이다. 중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 상당 수가 동부로 무작정 떠났다. 정부는 중국인 이민을 억제하기 위해 철도공사가 완공된 바로 그 해에 악명 높은 인두세(Head Tax)를 부과했다. 총리의 중국인 공헌인정 발언이 무색했다. 캐나다 도착 중국인은 1인당 50달러의 상륙세를 내야했다. 액수는 1900년에는 1백 달러로 올랐다가 3년 후인 1903년에는 500달러 -지금의 1만달러 -로 인상됐다. 인두세를 내고 온 중국인은 총 8만1천명이었고 이들이 낸 액수는 총 2천3백 만 달러에 달했다.

룽 키 리는 3남매중 둘째로 12살이던 1912년 광동성에서 ‘금산’으로 보내졌다. 아버지는 그가 빨리 돈을 벌어 집으로 보내주길 바랬다. 그는 9살짜리와 5살짜리 사촌들을 데리고 장도에 올랐다. 3명의 소년은 모두 목에 꼬리표를 달았다. 3주후 뱅쿠버에 도착, 마중나온 삼촌을 만났다. 삼촌은 그들을 온타리오주 선더베이로 데려갔다. 룽 리는 접시를 닦고 감자를 깍는 등 뭐든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는 삼촌이 대신 낸 인두세를 갚기까지 5년간 고용계약대로 열심히 일했다. 그는 빚을 갚은 후 철도 보수원을 거쳐 기차식당에 취직, 처음으로 막노동에서 벗어났고 임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

22살 때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가 정한 신부와 결혼했다. 1년 후 아들을 얻었으나 같이 지낼 사이도 없이 그들을 모두 두고 캐나다로 돌아와야 했다. 국외에서 2년을 넘기면 이민을 다시 신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온타리오주 윈저에 살며 그는 가족을 캐나다에 데려오는 날을 손꼽아 고대하며 아끼고 아껴 인두세 1천달러를 저금했다. 그러나 1923년 정부는 갑자기 인두세를 철폐하고 중국으로부터의 이민은 물론, 가족결합까지 전면금지하는 배척 법(Exclusion Act)을 제정했다. 청천벽력이었다. 그때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족과는 영영 만날 수 없는가. 이런 악법이 주효, 47년 법이 철폐될 때까지 24년간 입국한 중국인은 불과 50명 미만이었다. 매년 2명 정도만 입국된 것이다. 중국인들이 국가창립일 도미니언 데이(캐나다 데이)를 휴밀리에이션 데이(Humiliation Day) - 치욕의 날 - 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1930년 룽 리는 두 번째로 고향땅을 밟았다. 아내는 두 딸을 연거푸 낳았다. 단꿈도 잠시, 2년이란 허가기간을 넘지 않으려고 이들과 다시 이별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그가 아들과 지낸 시간은 극히 짧았다. 아들은 17살 되던 해 홍콩에서 병사했다. 가족 없이 혼자지내다가 죽었고 그가 묻힌 곳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이것은 룽 리를 평생 괴롭혔다.

중국인 배척법은 47년 드디어 철폐됐다. 룽 리는 수속 시작 후 3년만인 52년 가족과 재회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키스했지요. 나는 난생 처음 받은 남자의 키스이기 때문에 곧 얼굴을 닦아버렸어요.” 12살짜리 둘째 딸 린다의 말이었다. 이들은 뱅쿠버에서 기차로 떠나 윈저 부근 소도시 라살에 도착했다. 중국선조들이 피땀 흘려 건설한 기차 길을 그들은 한도 없이 달렸다. 그는 이곳에서 음식점을 경영했고 나중엔 중국 한약재 수입상이 됐다.

룽 리는 어떤 사람? “그는 늘 나눠주는 성격이었다. 또한 쉽게 친구를 만들었다. 쇼핑몰에서 동냥하는 사람을 보면 그는 동전을 주면서, ‘너희도 늘 도와야한다’고 말했다.” 린다의 회고다. 81년 부인이 79세로 죽고 딸이 뱅쿠버로 이사가게 되자 94세가 된 그는 토론토 근교 피커링의 너싱홈을 택했다. 이듬해인 95살 때까지 자동차를 운전할만큼 건강했다. 평소 열심히 걸은 덕분인지 100세가 지나서야 휠 체어를 이용했다.

작년 6월 스티븐 하퍼 연방총리의 공식 사과와 보상 발표 후 생존자중 최고령인 쿵 리는 철도부설용 대못을 상징으로 받았다. 이 못은 지금 150여년 전 철도가설을 결의한 의사당 ‘기차’사무실에 영구 비치됐다. 1885년 철도준공 기념식은 중국인 1명 없이 진행됐다. 귀빈들은 쇠로 만든 대못 한 개씩을 선물로 받았다. 121년이 지났지만 쿵 리가 받은 못도 이 중 하나다. 지난 10일 쿵 리는 107세 생일잔치에서 2만 달러 수표를 전달 받았다. 한 맺힌 돈이었다. 그는 5일후 병원서 눈을 감았다.

룽 키 리 : 1900년 3월 중국 광동성 출생. 피커링 너싱홈에서 15일 사망, 향년 107세. 유족 2딸과 손자손녀 7명, 증손자 12명.

by 100명 2007. 5. 22. 0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