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4)
루시 오브락: 프랑스 최고의 여성 게릴라


부부사랑 극진, 갖은 방법으로 남편 구출한 영웅
영화, 소설의 모델, 첫 여성 국회의원 돼



우리나라는 유관순을 가졌다. 그러나 33인의 독립선언서 서명자 중에는 여성이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6.25동란 중 북한 빨지산은 오랫동안 활동했어도 남한 레지스탕스가 인민군 후방에서 조직적으로 활동했다는 얘기는 들은 바 없다. 프랑스 역사선생 오브락여인에게서 배울 점 중의 하나다.

루시 오브락은 나치 독일점령군에 대한 레지스탕스(게릴라식 대항전)와 사랑을 조합, 세기적 명화 카사브랑카(Casablanca)에서의 잉글리드 버그만 역할을 했다. 또 자기를 소재로한 영화를 여러 편 만들게 한 프랑스의 학교선생이었다. 그녀의 영웅성은 84년 점령군 치하의 일기를 발간하면서, 또 자기와 남편 레이몽의 활동을 의심한 전기작가를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에서 승리하면서, 영화와 소설들이 나옴으로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 전기작가는 그녀 일기에 일관성이 없고 무리한 부분이 있어 그녀가 오히려 독일군의 끄나풀이 아니었는가하는 의심이 있다는 식으로 기술했다.

그녀의 운동은 처음부터 애정영화 같았다. 젊었을 때 그녀는 남편을 위해서라면 어떤 장애물, 심지어 독일의 악명 높은 게스타포(Gestapo;비밀경찰)도 두렵지 않았다. 그녀가 여러 번 남편을 감방에서 구출해 낸 것은 이런 사랑이었고 용기였다.

42년 말,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 파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 리용(Lyon)에는 ‘크라우스 바비’가 지휘하는 게스타포의 본부가 설치됐다. 43년 3월 저항운동을 하던 레이몽이 체포됐다. 독일군이나 독일이 세운 프랑스의 괴뢰 비시(Vichy)정부는 그를 암시장의 조무라기 정도로 알았다. 그녀는 대담하게 검사와 접촉, 그를 석방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6월 남편은 영국으로 망명한 드골장군이 은밀히 보낸 특사 장 물랭과 함께 있다가 또 잡혔다. 독일군들은 이들의 정체를 곧 알아냈다. 물랭은 혹독한 고문을 받아 죽었고 남편 레이몽은 죽도록 맞은 후 감옥에 갇혔다. 이때 그녀는 남편을 구해내기 위해서 특이한 작전을 시작했다. 임신으로 배가 부른 채 게스타포를 찾아갔다. 자신은 잡혀있는 청년의 약혼녀라면서 “약혼자는 의사를 만나러 갔다가 무고하게 잡혔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리용의 백정’이라는 악명을 가진 대장 크라우스 바비에게 안내됐다. 그녀는 배에 든 아기가 사생아가 안 되도록 결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바비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책상 설합에서 서류뭉치를 꺼냈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각종 서류들이었고 사진도 한 장 있었다. 그녀가 해변가에서 수영복차림으로 어린애와 함께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갖고 다니는 서류는 자신을 미혼이라고 했는데 해변가의 사진은 애를 가진 기혼여성으로 드러냈다. 어느 것이 맞는가. 그녀가 가진 미혼서류는 위조거나 아니면 미혼으로 애를 가진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바비는 그 ‘테러리스트’를 얼마나 오래 알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엉겁결에 ‘6주’라고 띄엄띄엄 대답했다. 바비는 그녀가 거짓말한다고 그를 쫓아내버렸다. 사진의 애는 누구 것이며 지금 임신은 교제 6주의 남자의 것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낙담하지도, 단념하지도 않았다. 다른 장교에게 접근했다. 장교는 그가 바비를 만나고 나왔음을 알 턱이 없었다. 게스타포 중위는 그의 얘기를 사실로 받아들였고 그들은 게스타포 본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가 일반 감옥으로 옮기는 날 게릴라들은 호송차를 습격, 레이몽과 13명의 ‘죄수’를 구출했다. 이보다 앞서 1940년 레이몽이 체포되었을 때 그는 바이러스가 감염된 알약을 전해주어 그가 병을 앓게 했다. 독일군은 그를 군병원으로 호송 중 그는 도망칠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검찰에 찾아가 남편이 즉시 석방되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이 친구는 변절자이므로 그는 치사한 겁쟁이다. 내가 우기면 그는 들어줄 것이다”라고 생각,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게 부딪친 결과 남편을 석방시키는데 성공했다.

오브락은 버건디(Burgundy) 포도농장 집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 그는 아주 우수했고 특히 역사학에 뛰어났다. 2차대전이 시작될 때 그는 스트라스부르그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이때 젊은 에지니어로 자기와 같은 공산주의자인 레이몽 사무엘을 만났다. 이들은 첫 눈에 반했다. 레이몽은 39년 결혼 전 자기가 유태인이며 유태인과의 결혼은 위험함을 경고했지만 그녀는 관계하지 않았다. 다음해 독일군이 리용을 점령하자 그녀는 게릴라전(‘레지스탕스’) 참가자를 구하는 사람을 만났다. 이래서 부부는 그 지역 그룹의 창설멤버 겸 지휘자가 됐다. 게릴라에 참가한 여성은 많지만 오브락처럼 지휘자급으로 활약한 여성은 거의 없었다. 이처럼 그녀는 평범한 여성이 아니었다. 독일군 점령 첫 2년간 그들은 자기 직업에 종사하면서 여러 가명을 써서 신원을 감추며 저항운동을 벌이는 이중 생활을 했다. 41년에는 첫 애를 가져 그녀는 선생이요, 어머니며, 레지스탕이라는 3중 생활에 종사했다. 42년 말 레이몽은 마지막으로 또 잡혔다. 게릴라들은 그가 있는 곳을 공격, 이번에도 그를 다시 구해냈고 부부는 44년2월 영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잠적했다. 그해 드골장군은 여성들의 애국심을 인정, ‘프랑스가 해방되면 여성들에게 처음으로 투표권을 주겠다’고 공약했다.

오브락은 전쟁 후 프랑스 최고훈장(‘레종 오뇌르’)를 받았고 그는 프랑스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됐다. 진정한 영웅인 그는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학생들에게 전시경험을 얘기해 주는 것을 의무로 삼았다. 영화와 소설이 그들 부부를 모델로 등장했다. 그러나 90년 ‘백정’ 바비가 죽은 후 그의 이야기를 부정하는 글들이 언론에 돌기 시작했다. 의심은 커져 오브락 부부는 프랑스의 저명 역사학자들 앞에서 변호해야하는 신세가 됐다. 그 기회는 부부가 마치 재판대에 선 모습이었고 악의적인 의견 공방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특히 43년 여름 리용의 그녀는 대단한 용기와 게릴라전의 동력이었다. 그의 남편사랑은 죽을 때까지 변함없었다.

by 100명 2007. 5. 22. 0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