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3)
로저 라울리 Roger Rowley 최고무공훈장을 두 개 받다


Roger Rowley 1917-2007


민병대 출신으로 소장까지 진급
2차대전서 탁월한 작전, 지휘력, 용감성으로 혁혁한 전과

▲ 캐나다 최고의 여권운동가이자 영향력있는 언론인이었던 도리스 앤터슨은 남녀평등을 말로만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는 지식인이었다.
39-45년에 참전했다가 돌아 온 캐나다 군은 거의 모두 군대를 떠났지만 소수는 군 생활을 계속했다. 라저 라울리도 그 중의 하나였다. 39년 그는 오타와 민병대(militia) 소속 소위로 유럽전투에 참전했다. 정규코스를 밟은 전통 직업군인이 아니었으나 돌아왔을 때 그의 가슴은 옆줄이 그어진 최고훈장 DSO(Distinguished Service Order)과 기타 작은 훈장들로 장식됐었다. 훈장의 옆줄은 같은 훈장이 두 개라는 뜻이다. DSO는 일반인에게도 주어지지만 전쟁 중 군인이 받았다면 그것은 영국왕실이 주는 빅토리아 십자훈장(Cross) 다음 서열로 말할 수 없는 영광이 된다. 라울리의 경우는 두 번 다 적의 집중 사격을 받으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아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을 확보한 공로였다.

44년 9월17일 영불해협에 있는 프랑스 항구 볼로뉴 탈환작전이 시작됐다. 볼로뉴는 독일의 히틀러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린 곳이었다. 대대병력을 거느린 그는 볼로뉴 시 가운데 있는 라 코쉐리 성 탈환을 명령받았다. 라 코쉐리 성은 성책과 물이 흐르는 호로 둘러싸였으며 독일병들이 철통같이 수비하는 요지였다. 캐나다 군 기록에 의하면 성의 탈환은 '듀마소설의 로망스‘ (알렉산더 듀마;프랑스의 국민적 소설가)같은 것이었다. 성 탈환에 고심하던 그에게 행운이 닥쳤다. 이 지역을 잘 아는 프랑스사람이 성안으로 통하는 비밀통로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라울리 휘하의 1개 분대가 반신반의하면서 새벽에 잠입, 독일병들을 기습하자 놀란 그들은 모두 항복했다. 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라울리 중령은 적의 집중포화 속에서도 대대를 예상보다 빨리 라 코쉐리 성의 바로 코 앞으로 밀어 부쳤다. 결국 그는 성을 결사적으로 수비하던 200명의 독일병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 작전성공은 나머지 연합국작전을 신속히 종결시켰다.‘ 훈장수여장의 설명이었다. ’이 장교의 지휘력, 용감성은 전군의 사기를 높였고 볼로뉴 시를 탈환하는 원동력이 됐다.‘

5주 후 그는 네덜란드 브래스켄에 있던 독일 수비대 병영을 점령, 또 하나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이 작전은 안트워프 항구를 연합군 병참기지로 하기 위한 작전의 하나였다. 이작전이 성공하기 전 캐나다군은 벨지움의 레오폴드 운하를 방패로 참호 속에 숨은 독일군을 하나씩 제거하는 어려움에 시달렸다.

44년 10월22일 브래스켄 작전이 시작됐다. 독일군은 병영주위에 너비 7미터나 되는 대 전차 참호를 파 전차의 접근을 막았다. 더군다나 깊이 4미터 참호 속에는 물이 흘렀다. 철통같은 방위였다. 첫 공격에서 캐나다군은 폭탄오발로 여러 명의 아군이 죽는 사고가 발생, 공격을 중지했다. 군의 표창 설명은 이렇게 이어졌다. ‘시간이 부족했으나 라울리는 기막힌 작전을 단시간 내에 수립하고 확신과 집념으로 장병을 지휘, 병영을 점령했다. 이로서 브래스켄은 탈환됐다.’ 라울리는 오타와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은행원이었다가 국회의사당 건너 오타와강변에 있는 목제소 사장이 됐다. 어머니 쪽으로는 캐나다의 제2대 대법원장 윌렴 리치의 손자였다. 아버지는 그가 18개월 됐을 때 사망, 어머니와 이모들 밑에서 컸다. 핼리팍스의 댈하우지대학교를 졸업한 후 오타와 민병대에 입대했고 한편으로는 오타와 주식회사에서 채권매매원으로 일했다.

그는 40년 5월 북대서양의 아이스랜드(Iceland)를 독일군 침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일단의 소규모 병력과 함께 파병됐다. 놀웨이는 1개월전 이미 독일군이 점령한 터였다. 독일은 아이스랜드를 기점으로 연합군에 잠수함 공격이나 연합국 선박수송단에 대한 공격기지로 삼을 우려가 있었다. 한참 전투가 치열할 때는 캐나다군은 2,700명으로 늘었으나 10월 말께는 대부분 영국으로 돌아갔다. 라울리 민병대는 그곳에서 겨울을 지냈다. 41년 그는 대위로, 42년에는 소령, 43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전쟁 말기 귀국한 그는 일본본토 점령군 훈련을 담당했다가 미국의 원폭투하로 일본이 항복하자 군대가 해체하는 바람에 여러 가지 다른 직책을 맡았다. 소장으로 진급한 그는 68년 퇴임, 여생을 봉사활동으로 일관했다.

“아버진 유머감각이 뛰어났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품위가 있었지요.” 아들의 말이다. “아버지 장례식 때 처음으로 깨달았는데 그들은 아버지가 자기들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한 사실에 감사했다. 난 아버지가 모든 부하들의 이름을 외고 그 부인들 이름까지 아는 줄은 몰랐다. 그는 아마도 계급을 막론하고 군인들을 인격적으로 대한 것 같다.”

라울리는 야외생활을 좋아했다. 그는 오타와 주택부근에 심어진 모든 나무종류에 대한 기록을 만들고 강이나 호수에 물고기를 넣어주는 일을 하는 위원회의 장이었다. 그는 낚시를 평생 즐겼고 동부캐나다에서 연어가 올라오는 모든 강에서 낚시를 했다. 그는 대서양 연어 보존연맹을 이끌었다. 85세 때야 비로서 중단한 스키광이기도 했다.

by 100명 2007. 5. 22. 0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