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2)
캐나다 여권운동의 최고 기수 도리스 앤더슨


Doris Anderson 1921-2007


▲ 캐나다 최고의 여권운동가이자 영향력있는 언론인이었던 도리스 앤터슨은 남녀평등을 말로만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는 지식인이었다.
남녀평등, 여성의 정계진출추진에 일생을 바치다.

팔팔하게 열성적으로 일하는 도리스 안더슨(Doris Anderson)은 그의 홀어머니가 운영하는 알버타 주 캘가리의 하숙집에서 자랐다. 50-60년 대 잡지편집이라는 남성세계에서 성공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여권신장의 기수였고 남녀평등을 주창한 사람이었다. 그는 20여년 간 여성 월간지 샤트랭(Chatelaine)의 편집자로 있으면서 잡지를 크게 성공시켰다. 그녀는 베티 프라이던(Betty Freidan)이 여자의 신비(The Feminine Mystque)라는 유명한 책이 나오기까지 약 10년간 캐나다 최고의 여권주의 운동자였다. 연방 외무장관을 지낸 정치인 프로라 맥도널드는 “도리스는 바위덩이와 같은 뚝심의 여자였다”고 회상했다. “도리스는 ‘국회의원 감 50인의 여인’을 특집 보도했다. 당시 다른 언론인들은 상상조차 못하던 파격적 기사였다. 그녀는 언제나 여자들을 내세웠고 정계에서 활동할 만한 사람을 골라 입문을 권했다.”

언론인 미셀 랜즈버그는 “도리스와 두 어 주 전에 점심을 같이 했는데 까십얘기 끝에 그녀는 여성의 비례대표 국회의원 문제를 거론했다. 무척 약해졌으면서도 도리스는 여성의 단결을 화제로 떠올렸다.” “그는 지난 40년간 캐나다에서 벌어졌던 어떤 여성운동에서도 사실상의 리더였다. 누구도 그만한 인물이 없었다.” 이퀄 보이스(Equal Voice) 운동의 회장이었던 언론인 로즈마리 스피어스의 말이다. 이퀄 보이스는 여성의 정치참여를 조장하고 여성들을 선거직에 당선시키는 일을 하는 단체다.

앤더슨은 65년 아드리안 클락슨 전 연방총독을 고용, 신간서적 소개업무를 맡겼다. 이 해는 클락슨이 CBC-TV에서 여성들을 위한 프로그램 ‘테이크 30’을 시작한 때였다. 이 프로그램과 샤트랭은 낙태, 피임, 성폭행, 아동학대 등의 문제를 겁도 없이 자주 취급했다. 앤더슨은 클락슨을 귀중한 동지로 보았다. 앤더슨은 특히 남성과 상대할 때 전투적으로 강했으나 내면적으론 부끄럼타는 나약함이 있었다. 그는 권위적이고 무대뽀인 아버지와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나는 남자들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지난 12월 인터뷰에서 그는 쾌활하게 말했다. “내가 배운 것은 그들과 경쟁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남자 형제들과 세 아들을 사랑했다. 여성운동과 별도로 그에겐 그들과의 관계도 퍽 소중했다.

앤더슨은 어머니 레베카 버크와 하숙생이던 아버지 토마스 맥커빈 사이에서 난 유일한 딸이었다. 어머니의 첫 남편 버크는 사기꾼이었다. 그는 앤더슨이 태어나기 수년전 집을 은행에 저당 잡혀 돈을 빼낸 후 도망가 버렸다. 23살 먹은 부인과 두 아들에게 많은 빚을 물려준 채. 어머니는 맥커빈과의 관계로 임신하자 형제들이 있는 메디슨 햇(Medicine Hat)으로 가서 앤더슨을 낳았다. 아기는 사생아 양육원에 맡겨졌다. 수개월 후 엄마는 마음을 바꿔 아기를 찾아왔다. 위대한 여권운동가의 운명은 이렇게 구제됐다.

앤더슨의 생부 맥커빈은 술이 심했고 도둑질 버릇이 있었다. 앤더슨이 8살 때 어머니와 결혼한 그는 성격이 고약한데다가 ‘목에 힘주는’ 권위적 태도를 가졌다. 앤더슨은 늘 그를 미워하면서 컸다. “나는 아버지가 차에 치워 죽기를 진심으로 바랬다.‘고 1996년도에 출판한 자서전 레벨 도오터(Rebel Daughter; 반항하는 딸)에서 기술했다. ”저녁상을 차려놓고 밥 먹을 준비를 하는데 아버지는 뒤늦게 들어와서는 좌상에 앉아 거만을 떨면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보수적이어서 딸이 입 다물고 순종하기를 원했다. 틴 에이저 앤더슨은 어머니의 종속적인 결혼관과 ’여자는 애를 잘 길러야한다‘는 당시의 규범을 배척했다.

그는 학교에서 보는 미혼 선생들을 인생의 모범으로 삼았다. 그는 사범학교를 졸업, 시골학교에서 가르치면서 학비를 모아 에드먼튼의 알버타대학교에 진학했다. 45년 졸업하면서 저널리즘에 뜻을 두고 토론토로 왔다. 그는 지금은 없어진 스타 위크리 잡지에서 기자 보조원으로 첫 직장을 잡았다. 51년 잡지 샤트랭의 사업부에서 근무, 본인에게는 물론 캐나다여성들을 위한 역사적 헌신의 시작이 됐다. “앤더슨은 생김새도, 행동도 여자이면서도 개처럼 일하는 점이 좋다.” 당시 그의 보스의 평이었다. 6년 후 그는 놀랍게도 편집자(editor)가 됐다. 경영진이 남자를 임명하려하자 그는 “사임하겠다”고 협박해서 차지한 자리였다. 이보다 2주전 그는 변호사이며 자유당의 전략가 데이빗 앤더슨과 결혼했다. 그와의 결혼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애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샤트랭에서 편집장으로 그는 요리강습, 미용, 자녀양육 등 여성들이 기대하는 기사 외에 낙태, 산아제한, 여성을 차별하는 이혼법, 남녀 직원간의 봉급차등 등 그들을 흔들어놓는 심층기사를 자주 게재했다. 그는 이런 문제를 다룰 줄 아는 이름난 기자들을 고용했다. 그의 첫 사설은 여성들이 의회에 좀 더 진출해야한다는 것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58년에는 여성국회의원이 단 2명뿐이었다. 이래가지고는 여권이 신장되지 않고 남녀평등이 해소되지 않는다고 그는 역설했다. 그는 엄격하고 용서없는 낙태법을 공격했고 여성지위에 관한 왕립조사단 구성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는 또한 어린이학대, 인종차별, 원주민의 고통 등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일부는 그가 ‘좋은 건강한 잡지를 여성주의 걸레로 만든다’고 비난했지만 60년대에는 구독자가 4배나 늘어 180만 명이나 됐다. 그는 발행자인 매크레인-헌터를 돈방석에 앉게 만들었으나 그의 보수는 한 번도 시사주간지 매크레인즈(Maclean‘s) 편집장만큼 되지 않았다. 그가 연봉 2만3천달러를 받을 때 구독자 감소로 고민하는 매크레인즈 편집장은 69년 불과 6개월을 일했으면서도 연봉이 5만3천달러였다. 편집장이 드디어 쫓겨난 후 앤더슨은 후임을 원했으나 피터 고조우스키(Peter Gzowski)에게 넘어갔다. “내가 남자였다면 그 직책을 맡겼을 것이다. 아직도 분하다. 지금 같았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앤더슨은 지난 12월 인터뷰에서 말했다. 77년 샤트랭 잡지의 발행인 밑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어서 사임했다. 발행인 자리도 바랐으나 그의 차지가 되지 않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일벌레인 그는 78년 토론토의 의원 보궐선거에서 자유당후보로 나섰으나 반 트뤼도 정서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그는 자신이 정당정치가 요구하는 당수에 복종하는 성격을 갖지 않았음을 깨닫고 정계진출을 단념했다.

79년 그는 연방정부의 ‘여성지위에 관한 국가자문위원회’ 회장에 임명됐다. 80년 재선에 성공한 트뤼도 수상이 헌법의 ‘캐나다이관’을 추진하자 앤더슨은 여성차별 금지조항을 헌법에 삽입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앤더슨은 이것이 60년 제정된 쓸모없는 권리장전(Bill of Rights)의 복사판임을 알았다. 권리장전은 여성들이 10번의 재판에서 번번히 패소한 있으나마나한 조항이었다. 그는 헌법전문 변호사를 고용,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들어가 싸우게 했다. 그러나 앤더슨 그룹의 일부 이사들조차 정부편에 서자 앤더슨은 항의 사임했다. 후로라 맥도날드 보수당 여의원등이 나서 의사당에서 항의시위를 열자 전국에서 무려 1천300명의 여성이 몰려왔다. 81년2월 결국 자유당 정부가 굴복, 권리헌장(the Charter of Rights)에 새 조항이 추가됐다. ’헌장이 언급한 모든 권리와 자유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됨을 헌법은 보장한다.‘고 헌법은 천명했다. 앤더슨은 82-84년 전국 700개 여성단체의 연합체인 국가행동단(The National Action Committee)의 회장이 됐다. 그러면서 토론토 스타 지에 정기칼럼을 썼고 이런 중에서도 3번째의 여권신장, 인권보호에 관한 소설을 발간했다. 앤더슨은 이렇게 주장했다. ’북미여성들은 선거제도를 유럽 여러 나라가 채택한 인구 비례대표제로 바꾸지 않는 한 상위직으로 진출할 수 없다.‘

그는 말년에 두 번 심장마비 증상을 앓았고 허파도 나빠졌다. 지난 12월 병원에서도 여권운동을 얘기했다. 여기엔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죽을 권리 허용’ 주장이 추가됐다.

by 100명 2007. 5. 22. 0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