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1)
짐 로버츠, 인간을 사랑한 자유주의적 신부


Rev. Jim Roberts 1928-2006


▲ ‘평민의 신부’ 짐 로버츠. 그의 견해는 신문기자들에게는 인기가 있었으나 자기 교회로부터는 소외됐다.
용감하게 교회를 고소하고 정부비판한 80년대의 ‘평민대변인’

짐 로버츠 신부는 가톨릭교회의 교리가 자기 의견과 일치하지 않을 때 잠자코 수락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낙태, 이혼, 동성혼, 여성사제 임명, 신부의 종신 독신, 피임약 사용 등의 문제에서 "교회 교리가 너무 보수적이고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공개 비난, 교회의 미움을 샀다. 교회가 도덕적 ‘죄’로 보는 곳에서 그는 복잡한 인간조건의 불가피성을 보았다. 그는 바티칸 교황청이 60년대의 개혁운동에서 벗어나 보수적 교리해석으로 돌아서고 뱅쿠버 대교구청마져 정치적 보수로 방향을 바꾸자 분연히 일어났다. 비교종교학의 오랜 교수 배경을 가진 그의 견해는 권위가 있었다. 20여 년 간에 걸친 그의 교회와의 대립은 95년 연금문제로 대주교와 교구청을 고소했을 때 극에 달했다. 그러나 그는 신앙심에 전혀 동요가 없는 철저한 신부였다.

그런 면모 이외에 그는 ‘평민의 신부(the priest of the people)’라고 불려 질 만큼 어려운 처지의 평민들을 힘껏 도왔다. 어떤 이유로든지, 교회와 거리를 둔 주변 신자들을 찾아 그들을 다시 교회로 되돌려 보내는 일은 그의 주요 일과였다. 장례식에서 자포자기로 술에 취한 여인을 만나자 성당에 데려다가 보살핀 후 교회로 다시 돌아가게 한 일도 있었다. 남녀노소를 막론, 그의 인간사랑은 극진했다.

아일랜드계인 신부는 28년 뉴욕시 브루크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쇄소 타이프세터, 고집불통 성격을 물려준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12살 때 그는 성직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2년 후부터 신학공부를 시작, 총 14년간을 수학했다. 그는 28세 되던 56년 서품 받아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주 몬로(Monroe)시에 부임했다. 교구 신자들은 전원 흑인이었다. 몬로는 백인우월주의 극렬단체 쿠 클럭스 클란(Ku Klux Klan)의 지역본부가 있는 곳이었고 또한 그곳은 전 해병대원 로버트 윌렴스가 이끄는 전투적인 흑인지위향상 전국연합회가 지회를 둔 곳이었다. 로버츠 신부는 마침 쿠 클럭스 클란 집단의 흑인거주지 공격 때 부임했다. 당시는 흑인아동들이 시 수영장을 백인과 같이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 흑백 간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던 어려운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두 명의 흑인소년이 백인소녀 1명을 키스했다고 해서 투옥된 사건이 전국적 조명을 받던 때였다.

이런 극단적 대립과 바람 잘 날 없는 충돌 현장에서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정의로운 분쟁해결에 노력했다. 흑인들의 ‘평화의 행진’이나 반 빈민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피나는 이때 경험은 신부에게 강인한 사회적 신념을 심어 주었다.

그런 노력의 덕분인지 사태는 미봉된 채 그는 수년 후 뱅쿠버 지역, 버나비 ‘자비의 모후’ 성당으로 전임됐다. 피부로 인한 분쟁이 없는 평화스런 지역이었다. 72년 그는 휴직하고 뱅쿠버 랭가라(Langara) 칼리지에서 종교와 라틴어를 가르쳤다. 한편으로는 그는 교회통합운동, 특히 동양 종교와 서양의 기독교 연대를 위해서 노력했다.

83년 빌 베넷 주수상이 내핍정책을 발표하면서 정부지출과 서비스를 대폭 줄이자 극빈자들의 생계를 염려한 그는 노동계 및 지역주민 대표들과 함께 반대운동에 나섰다. 공동대표가 된 그의 이름은 이 운동으로 주 전역에 알려졌고 그는 유명 ‘정계인사’로 통했다. 다음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내방을 앞두고 그는 교황이 주정부의 빈민층 탄압정책을 공개 비난해 달라고 탄원했다. 그는 수년전 필립핀에서도 이같은 일을 주동해서 교황이 이에 응하도록 했었다. (*이에 대해 그롭 앤드 메일 지는 ‘필립핀은 독재자가 지배하지만 브리티쉬 컬럼비아는 선거로 선출된 수상이 통치하는 것을 신부는 망각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논쟁을 두려워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의 가까운 친구들은 “그가 논쟁으로 잠을 설치거나 괴로워하는 따위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사심없는 그의 성격은 반대자들 조차 그를 미워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적이 없었다. 그 역시 어떤 인간을 막론, 미워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65세가 되던 95년까지 가르쳤고 그 후에도 계속해서 글을 썼다. 정년을 맞아 학교에서 나온 그는 주교에게 성당복귀를 요청했다. 이 청원이 2년간이나 수락되지 않자 그는 신부봉급과 연금 지불 불이행을 이유로 교구청을 제소하고 인권옹호위에도 탄원했다. 제소이유는 자신의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견해가 교회와 다르다고 해서 인간차별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보복이 아니다. 나는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할 뿐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이태리 은퇴자들을 위해서 무보수로 미사를 주관하겠다고 했다. 나는 아무 일이나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도 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축출 당했다.” 그는 교구내의 다른 신부들이 형사처벌을 받았거나 사제서품 서원을 지키지 않았는데도 연금을 받은 전례가 있음을 밝혀냄으로서 교구청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는 고소를 취하했고 매달 연금을 받았다.

집안 정돈은 잘 안 해도 수준급 정원사인 그는 예를 들면 살아있는 식물이라면 아무리 볼 품 없어도 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면서도 파리지안 카페와 이태리 포크송(민속 노래)을 즐겼다. 외국여행에 다녀와서는 자세하게 기술한 일기장을 친구들에게 돌리는 자상함도 있었다. 자제하기 힘든 미식가였고 그래서 뱅쿠버의 유명 음식점 주인들과도 죽을 때까지 친구관계를 유지했다.

신부는 한때 내세에 대해서 신문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그는 천당을 ‘인간지능으로 이해가 안 되는 신비스런 장소’로 설명하면서 천당의 존재를 의심치 않는다고 강조했다. “천당에 대한 설명은 물질적이고 부질없다. 참종교의 의도와도 맞지 않는다”라고 그는 대답했다. 짐 로버츠 ; 28년5월 뉴욕서 출생, 작년 12월23일, 신부서품 50주년 바로 다음날 뱅쿠버에서 식도암 사망. 78세.

by 100명 2007. 5. 22. 0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