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0)
최초의 유태계 온타리오 최고법원 판사


재판보다 비공식 면담제도 개척한 가정법의 거목 에이브라함 리프(Abraham Lieff) : 1903-2007


▲ 2003년 백수(100세)를 맞은 에이브 리프.
인종차별에 굴하지 않은 노력과 재능의 인간
88세까지 일하고 99세 때 토론토대학교 다녀,
가장 좋아하는 활동은 “아침에 눈뜨는 것”

유태계 예루살렘성경과 스컬캡(skullcap:유태교신자들의 검은 모자)을 쓰고 온타리오 최고법원 판사선서를 한 아브라함 리프. “그의 깊은 신앙심은 그의 인생항로에 계속해서 생명수를 준 우물이었다.” 유대교회당의 랍비 말이다.

“에이브(에이브라함의 약칭)는 개척자였다.”고 여자판사 로잘리 에이벨라는 말했다. 70년 초 리프가 판사였던 법정에 변호사로 등장했던 에이벨라는 현재는 연방최고법원의 판사다. “그는 특히 가정문제에 관한 한 수퍼스타였다.”

그는 첫 유태인 출신 첫 주 최고법원 판사였고 이것은 그 후 법조계의 인종차별 타파에 큰 역할을 했다. 그가 가정법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68년 이혼법이 제정될 때까지 가정법을 심각하게 전문으로한 법조인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고 에이벨라 판사는 말했다.

“그는 전세계적으로 신사로 알려졌고 또한 인간적이고 아주 현명하며 그러면서도 겸손, 마음이 넓은 착한 사람으로, 즉 훌륭한 판사라면 가져야 할 모든 덕목을 갖춘 인간으로 유명했다.”“그는 법에 대한 이해가 깊었을 뿐 아니라 그 법을 어떻게 정의롭게 적용할 줄을 알았다.” 뱅쿠버에 사는 리프의 유일한 남매는 “오빠는 언제나 오빠다웠다. 특히 아버지가 41년 사망한 후 그는 아버지같은 존재였다.“고 회상했다. 여동생의 남편이 죽은 지난 5년간 에이브는 바쁜 일과에도 불구, 동생에게 매일 전화를 걸어 위로하는 인간성을 가졌다.

그의 아버지는 유럽 벨라루스 지역에서 이디쉬어(유태언어의 일종)를 가르쳤다. 그후 그는 소련군에 징집되자 도망쳐 나와 오타와지역에서 살았다. 부인은 18개월 된 에이브를 데리고 1904년에 합류했다. 아버지는 시골을 돌면서 농부들에게 물건을 팔고 양철들을 대신 받아 기차를 통해 오타와로 수송하는 일을 했다. 그후 사업을 접고 유태학교 교사가 됐다.

에이브는 학교에 다니면서 호텔보이, 상점점원, 전보 배달원등으로 일했다. 배달부로서 가장 자랑스런 기회는 14살이던 1917년에 있었다. 윌프리드 로리에(Wilfrid Laurier) 전 연방수상의 집 초인종을 눌렀고 그가 직접 문을 열어주었던 것이었다. 그는 에이브를 집안으로 초대한 후 인생의 목표 등을 묻고 하인에게 케이크를 주라고 말했다. “내 머리통만한 초코렛이었다. 윌프리드 경(Sir)이 바로 앞에 앉아 내가 먹을 동안 말을 걸었다. 내가 일어나자 그는 내 손을 잡으면서 25센트짜리 팁을 주었다. 그날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에이브의 회고담. 그는 오타와 라프라이더 프로축구의 열렬한 팬이었고 밴조(banjo)를 밴드단과 연주하는 전문음악인이었다.

당시 변호사가 되려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사무실에서 견습기간을 보낸 후 온타리오주의 유일한 법대 토론토의 오스굿 홀(Osgoode Hall)에 입학해야 했다. 그는 21년에 입학했고 시민권을 받은 지 1주일만인 26년 11월에 변호사가 됐다. 시민권이 필요요건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오스굿 법대 시절 그는 변호사사무실에서 주당 7달러를 받으면서 일했고 밴조 연주로 용돈을 벌었다. 주일엔 주일학교에서 가르쳤다. 후에 결혼한 새디는 몬트리얼 소재 매길대학 법대의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이들은 25년 오타와에서 열린 유태소년소녀 모임에서 만났다. 새디 역시 온타리오주 변호사가 됐고 이들은 29년 퀘벡시티에서 결혼했다.

30년대의 이름 있는 법률회사들은 유태인이나 여성변호사를 차별했기 때문에 이들은 오타와에서 자신들의 회사를 차렸다. 그는 부인을 아주 자랑스러워했고 그녀가 여성으로서 변호사가 된 것을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이들은 대공황(29-30년) 때 위기를 맞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에이브는 일당을 받는 검사직을 수행했다.

유능하지만 유명 법률회사로부터 차별당한 변호사는 유태계만 아니었다. 불어계도 비슷했다. 퀘벡출신의 첫 온타리오 최고법원 판사는 36년 슈브리가 처음이었다. 에이브는 그와도 함께 일했다.

에이브는 39년 처음으로 지방법원 판사가 됐다. 그는 청소년범죄와 첫 범법자에 관심이 컸다. 여러 유명 인사들이 그의 도움과 관대한 처벌을 받고 성공했다. 63년 자유당정부는 그를 첫 유태계 온타리오최고법원 판사로 임명했다. 그가 60세 때였다. 당시 법으로는 판사들은 토론토 10마일 이내 지역에서 살아야하기 때문에 그는 오타와를 떠났다. 그는 오타와 서부 자유당연합회 회장, 이스라엘협회 창설, 키와니스 클럽(Kiwanis club) 회장 등을 맡으면서 사회, 정치, 종교적으로 많은 활약을 했다. 토론토에서는 프로풋볼 대신 토론토 야구 불루제이스 팀의 팬이 됐고 한편으로는 정원가꾸기, 요리, 음악(밴조 대신 기타리스트가 됨)에 조예가 깊었고, 유태회당에서 청소년을 가르치며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일도 활발히 벌였다.

그는 판사로서 정식 재판전의 원고 피고 분쟁자 비공식 면담제도(pre-trial)를 개발, 이 방면의 개척자가 됐다. 이같은 분쟁해결은 이젠 민사, 형사, 가정법 분규에서 하나의 공식으로 수락됐지만 당시는 전통적 사고를 가진 재판관들의 반대가 컸다. 이들은 “우리의 업무는 판단이지, 중재가 아니다”라고 항의했다. 에이브는 재판날짜가 정해지기 전 양측 변호사를 불러 문제점을 찾고 해결책을 모색했다. 비공식 대화이기 때문에 분위기는 솔직하고 포괄적이었다. 해결점이 찾아지지 않으면 에이브는 사건을 다른 판사에게 맡겼다. 에이브는 78년 은퇴연령이 꽉 찰 때까지 봉직했다. 그러나 그만한 역량을 가진 그가 조용히 은퇴생활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결국 법원의 코미셔너, 부판사 등으로 88세까지 일했다. 그가 토론토대학교에서 유태학을 공부한 것은 99세 때였다. 2003년 3월 100세를 맞았다.

그는 평생 중에서 가장 자랑스런 업적으로 “공적으로는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 사적으로는 새디와 결혼하고 70년을 산 것” 두 가지를 들었다. 장래의 희망으로는 관절염 치료와 이스라엘의 평화정착, 세계의 안정이라고 말했다. 가장 좋아하는 활동으로는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는 것”이라고. 그는 이달 초까지 아침에 일어나다가 허파에 물이 차기 시작하면서 중단했다.

에이브 리프: 1903년 폴란드 출생

2월12일 토론토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서 사망. 향년 103세. 직계 유족으로는 두 딸과 손자 5명, 증손자 7명.

by 100명 2007. 5. 22. 0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