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19)
‘미인은 바보’라는 말은 허위


모델출신 오드리 모리스(Audrey Morris)는 성공한 사업가 (1925-2007)
학교, 공급대행소, 화장품회사 등 3개사 창업
사망 직전 주까지 일 한 노력형 완벽주의자



▲ "오드리와 일하는 것은 졸업반에서 공부하는 것과 같았다"고 한 모델은 회상했다.
오드리 모리스는 60-70년대 캐나다 최고의 모델공급대행소(에이전시) 운영자였다. 그러나 모리스가 성공한 것은 이 것 뿐이 아니다. 똑똑하고 창의적인 그녀는 모델학교를 세웠고 화장품회사를 창업했다. 그녀는 지난달 풀로리다에서 81세로 타계하기 바로 전 주까지 일손을 놓지 않은 일벌레였다.

몬트리얼은 캐나다 최고의 패션 캐피틀(수도)이다. 모리스 모델회사는 TV와 인쇄매체 뿐 아니라 패션쇼에 최고의 모델을 공급했다. 이 학교는 이바나 트럼프(Ivana Trump)등 많은 유명모델을 길러냈다.

화려한 사업을 이끌어가는 사람치고는 그녀는 아주 소박하게 출발했다.

25년 몬트리얼에서 오드리 퍼거슨(Ferguso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차 수리공이었다. 노동자/기술공들이 많은 로스몽(Rosemont)에 살면서 다운타운 몬트리얼고교를 다녔다. 14살 때 이튼백화점의 모델로 발탁될 정도로 미모와 체격을 가졌다. 몬트리얼 미술박물관이 경영하는 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면서 모델 일을 계속했다. 2차전 중에는 CP철도회사의 전신부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했다. 이때 그녀는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45년에는 주식 브로커 크레리 모리스와 결혼, 다음 10여년 간 가사에 몰두했다. 그 후 부유한 손님들을 주고객으로 하는 모간백화점의 패션 ‘코디’로 취직했다. 67년 몬트리얼 엑스포(Expo)는 그녀에겐 큰 기회였다. 전국에서 몰려온 수많은 전시요원들에게 화장술에서부터 매너에 이르기까지 교육하는 일을 맡았다. 외국 전시관의 여성직원들도 그녀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아름답기 위해서는 요염할 필요는 없지만 우아할 필요는 있다.(You don't have to be glamorous to be beautiful, but you do have to be graceful.) 피부관리가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모양보다 우선한다”고 그녀는 인터뷰에서 강조했다. 이때쯤 그녀는 자신의 화장품회사를 발족했다. 그녀는 취미로 꿀벌을 기르는 아버지로부터 배워 꿀벌의 밀랍에 꿀과 레몬 등을 섞은 피부미용제를 개발했다. 회사와 학교, 모델 에이전시는 모두 몬트리얼 다운타운의 프라스 보나벤처(Place Bonaventure) 상업/전시 콤프렉스에 두었다. 임대료와 유지비가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사람 눈에 잘 띠고 회사의 품격을 높이는 선택한 것이다.

“오드리는 성격이 좋고 매력적이면서도 사업수완이 뛰어났다”고 이튼백화점의 조운 에어드 패션책임자는 회상했다. 에어드는 이튼 패션쇼에 모델을 주문하면 모리스는 무려 12명이라도 즉시 보냈다고 말했다. 모델학교는 교사가 17명이나 됐고 비디오카메라를 이용, 걷는 법, 자세 등을 교습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그녀와 함께 일한 사람들은 그녀의 장점은 우아함과 철저한 교육이라고 지적했다. 그녀는 언제나 완벽하게 옷을 입었고 학생들도 그렇게 하기를 원했다. “그녀와 같이 일하는 것은 졸업반에서 공부하는 것과 같았다. 학생들은 그녀가 가르친 모든 것을 마지막 수업인양 기억해야 했다. 학생들은 자신의 최선을 보여주는 한편, 예를 들면 반드시 조화되는 신발을 신어야 했다.”

뉴욕의 패션전문지 보그(Vogue)는 그에 대해서 보도, 그녀 이름은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전성기의 학교는 여자모델 40-50명, 남자모델 25명, 아동 60명을 관리했고 학생들은 뉴욕, 런던, 파리까지 파견됐다.

모리스의 최고 학생은 이바나 젤닉코바(Ivana Zelnickova)라는 체코출신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몬트리얼로 이주, 주위의 권고로 모리스의 모델학교 문을 두드렸다. 76년 그녀 밑에서 모델을 시작하자마자 이바나는 스타가 됐다. 그녀는 모델로서 뿐 아니라 일이 되게끔 조직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모리스는 76년 이바나를 몬트리얼 올림픽 프로모션을 위해 뉴욕으로 보냈다. 이것이 이바나의 운명을 바꿨다. 모델들은 고급음식점의 특별실에 초대되었다. 모두 도날드 트럼프라는 남자의 주선 덕분이었다. 이바나는 결국 미국의 부동산 및 호텔/카지노재벌 도널드 트럼프의 부인이 됐다(77-91년). 이바나는 모리스의 죽음에 대해서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부(mentor)였다."고 최근 말했다.

한편 모리스의 화장품사업도 계속 번창했다. 83년 남편이 죽자 그녀는 회사를 플로리다주의 팜파노 비치로 옮겼다. 모델학교를 86년 팔아버린 후 화장품업에만 전념했다. 그녀는 동업자인 아들 웨인(Wayne)과 함께 어느 해에는 국제화장품 쇼 16개에 참가한 적도 있었다. 직원 25명을 둔 회사는 피부미용제 43개, 화장품 600종류를 생산, 미국, 캐나다 등 20여 개국에 팔았다.

모리스는 평생 운동을 좋아했다. 특히 수영과 스키를 즐겼다. 평생 쉬지 않고 여행을 했다. 작년 80세 땐 남아프리카와 인도를 방문하면서 자사제품을 선전했다.

“그녀가 성공한 것은 중단 없는 노력과 완벽주의를 추구한 때문이다. 그녀는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고 늘 말했다.” 친구들의 말이다.

by 100명 2007. 5. 22. 0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