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17)
북미의 풍요한 생활 거부한 의사 - 댄 힐맨 (Don Hillman 1922-2006)


아프리카, 아시아 등에서 일생의 중요시기 바쳐
진료, 의대생 양성, 아동건강 증진에 평생 헌신



▲ 94년 아프리카 병원에서 근무하는 댄 힐맨.
몬트리얼 아동병원의 소아과의사 댄 힐맨(Don Hillman)은 69년 어느 날 극도로 흥분해서 집에 도착했다. 아프리카 케냐(Kenya)의 나이로비 대학교에 새 의과대학이 설립되는데 자기가 이 일의 책임자로 이름이 올랐다는 것이다. 역시 소아과의사인 부인 리즈(Liz)는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너무나 소중한 기회군요”라고 맞장구쳤다. 철학이 비슷했던 것이다.

불과 2주 후 힐맨 부부와 12살 미만의 자녀 5명은 보따리를 싸서 지구 반대 편 세계로 가는 길에 올랐다. 케냐, 어떤 나랄까, 애들이 잘 적응할까, 으스스 하기도 했다.

아프리카로 이사한다는 것은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예상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예상하지 못했던 너무 많은 일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활수준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부부는 자신들을 달래며 의과대학의 외래진료 체제와 의대생 교육/훈련에 온갖 정력을 쏟았다. 부부는 가정에서의 아이들 건강, 예방의학, 공공보건의 향상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농촌지역의 보건과 교육 기회 제공 등에도 전 교수진이 힘쓰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곳에서 보낸 2년은 그가 세계 어린이의 건강을 위해 시작한 평생에 걸친 운동의 서론이었다. 그는 세계 각지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의과생들을 길러냈다. 학생들은 그를 단순한 교수라기보다 멘토(Mentor:정신적 지도자)로 보기도 했다. 힐맨은 그후 케냐, 우간다, 잠비아, 탄자니아 등의 아프리카, 쿠웨이트 같은 중동, 라오스, 말레이시아, 싱가폴, 파키스탄, 필립핀, 인디아 등의 아시아, 가이아나(남아메리카)에서 도합 35년간을 가르치고 치료했다.

겸손한 성격에 노래부기가 취미인 힐맨은 아프리카에서 6번의 쿠테타를 목격했다. 제일 처음은 71년 우간다에서 독재자가 된 이미 아민의 정변이었다. 여차하면 튈 준비가 필요, 그들은 늘 ‘쿠테타 백(Coup kit)’이라는 주머니를 찼다. 이 안에는 여권과 현찰을 넣어두었다. 우간다에서의 어느 깜깜한 날 밤 힐맨은 빨리 국외로 피신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백인들은 죄가 없어도 생명이 위험했다. 그는 케냐로 들어가는 표시도 없는 국경에서 위험에 직면했다. “우린 통나무를 싣고 비닐로 덮은 트럭 속에 숨어 국경을 겨우 넘었다. 총소리가 우리를 쫓아왔지만 무섭기도 하고 스릴도 있었다”고 부인 리즈는 회상했다.

한번은 깊은 산 길에서 자동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댄은 리즈를 차에 두고 혼자서 걸어내려 갔다. “남편은 지나오면서 교회로 보이는 건물을 보았다고 했어요. 멀지 않다는 것이죠. 주위에서는 총소리가 들리는 상황이었죠. 달리 방도가 없어 나는 차에서 기다리기로 했어요. 그는 5시간 만에 돌아왔지만 나는 그도 죽고 나도 죽을 줄 알았어요.” 그들의 자녀들은 다행히 보모가 다른 곳에서 보호해서 무사했다.

댄은 몬트리얼 매길대학교에서 엔지니어 공부를 했고 2차대전 말기에는 캐나다 포병장교로 참전했다. 전장터를 본 그는 전후에 의학으로 전환, 매길대학교를 졸업했고 56년 미국 보스톤에서 소아과의사 자격을 받았다. 3년전 몬트리얼 아동병원에서 만난 리즈도 보스톤에서 소아과를 공부하고 있었다. 리즈에 의하면 댄은 여자 친구가 많았다. 55년11월 리즈가 의대수련생(인턴)으로 있을 때다. 병원측은 학생들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리즈는 돈이 궁했다. “나는 댄에게 60달러만 꿔달라고 했다. 나는 부끄러워 미국인들에게 요청하고 싶지는 않았다.” 댄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는 “그것은 큰 돈이기 때문에 만나서 얘기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나를 만나러 왔고 한 달 후 우리는 몬트리얼에 가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은 가정에서나 병원에서나 행복한 생활을 유지했다. 댄은 늘 앞장서 가는 사람이었고 리즈는 잘 조직하고 구성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우습기도 하지만 아주 열심히 일하는 우수한 의사죠. 평생에 어린애들에게 얼굴 찡그런 적이 한번도 없어요.” 이들은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도 애들을 함께 잘 돌보았다. 리즈는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 아주 즐거웠다고말했다. 57년 댄은 몬트리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매길대의 교수로, 나중엔 부학장이 됐다. 가정도 직장도 안정적이었고 생활은 풍요로 왔다. 진급 전망도 좋았다. 이때 운명은 좀 더 어려운 일을 하라고 그들을 불렀고 그들은 이에 순응한 것이다.

85년 다시 우간다로 가서 매커리어 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아동건강센터를 세웠다. 정적을 죽여 인육을 먹었다는 독재자 이디 아민은 6년 전 쫓겨났다. 그러나 그의 집권 중 많은 시설과 제도가 망가졌다. 병원시설도 피해가 많았다. 댄은 팔소매를 걷어 부치고 복구작업에 나섰다. 의대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미숙아를 키우는 인큐베이터를 고치기도 하고 랜드 로버 차를 수리하기도 하면서 모범을 보였다.

89년 이 부부는 온타리오 해밀튼의 맥마스터 대학교로 돌아왔으나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해외에서 부르는 소리가 전보다도 높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의사로 평생을 보낸 슈바이처는 아니지만 이들은 라오스, 베트남, 중국, 말레이지아에서 가르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치료보다는 예방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94년에는 오타와대학교로 다시 옮겼으나 그 후 10년간 부부는 파키스탄, 케냐, 가이아나, 인디아등의 프로젝트를 도왔다. 그들은 또한 8개국의 프로젝트를 코치하는등 상담역을 성심성의껏 수행했다. 부부는 똑같이 이 해에 캐나다 국가훈장(Order of Canada)을 받았다.

2005년 이들은 왕립의사협회 회원이 되는 영예를 받았고 이들의 의뢰로 캐나다 의과대학이 아프리카 지역의 아동보건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기 위해서 떠났다. 이것이 마지막 여행이었다.

도날드 힐맨: 25년 몬트리얼 출생. 작년 7월 오타와에서 천식 악화로 사망. 향년 81세.

by 100명 2007. 5. 22. 0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