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16)
피부색이란 무엇인가?
영화관조차 ‘브라운’’옐로우’들 지정석으로 차별


푼잡 태생 스푸니 싱Spoony Singh (1922-2006), 왝스 박물관으로 갑부대열


스푸니 싱은 황금색 캐딜락을 몰면서도 자켓에 넥타이 차림대신 인도 네루(Nehru)수상이 입던 네루자켓을 즐겨 입었다. 헐리웃 왝스(Wax)박물관 주인인 그는 머리에 터반을 둘렀고 신앙심은 없으면서도 돈독한 시크교도처럼 수염을 길렀다. 때때로 방문자들은 그를 하나의 밀납(왝스) 조형물로 오해하곤 했다.

▲ 스푸니 싱이 마리린 몬로 상을 만지고 있다. 몬로는 영화 ‘7년만의 외출(The seven year itch)'에서 흰 스커트가 지하철 바람에 날리자 이를 내리 누르고 있다. 그는 늘 뿌리를 의식, 터반을 쓰고 네루복장을 했다.
65년1월 반 마일에 뻗친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던 손님들에게 첫 문을 연 박물관은 실물크기의 대통령, 영화배우, 종교계 인물과 역사 속의 저명인사들을 진열했다. 이중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을 본 딴 인물상들은 가장 인기가 높았다. 손님이 전시인물 중 유태인계가 없는 것을 지적하자 싱은 즉시 영화 ‘10계명(The Ten Commandments)’의 주연 찰톤 헤스톤 상을 주문하는 기지를 보였다. 그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끼 있는 사람이었다. 해가 갈수록 그의 인기는 높아져 전시인물 만큼 유명해졌다. 거리 파레이드에서는 코끼리를 타고 등장했고 잡지 까십칼럼의 단골 메뉴였다.

“우리 가족은 먹을 것을 찾아 인도를 떠났다. 그런데 이젠 내 살을 빼달라고 의사에게 돈을 주는 신세다.” 그의 말에는 감탄과 한탄이 반반씩 섞였다. “진정한 스타는 먼저 내 왝스상점의 전시물이 되어야 진짜 헐리웃 스타로 탄생하는 것이다.”고 떠들기도 했다. 그의 떠들썩한 선전은 그의 박물관을 크게 성공시켰다. 그는 농장과 금광, 창고업을 했고 맥시코와 헐리웃 근교 태평양 바닷가 변의 말리부(Malibu) 부자동네에 집을 지어 파는 건축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그의 집도 거기에 있었다. “난 지금 아주 신이 납니다.”그는 인터뷰서 주저 없이 말했다. 그의 성공은 그가 가난한 인도에서 왔다는 점 때문에 더욱 각광을 받았다. 그는 뱅쿠버 아일랜드에서 자라면서 돈을 조금 벌었다가 다 잃었다. 그의 실패와 성공은 왝스박물관 부자가 될 때까지 여러 번 반복됐다. 그의 인생자체가 한편의 영화였다.

인도인들, 일본, 중국인보다 더 한 차별대우 받아
뱅쿠버 상륙거절로 2개월간 배에서 살아
“브라운 침략을 막자”, 한때 전국이 떠들썩

샘퓨러 싱(Sampuran Singh Sundher)은 영국이 지배하던 시절, 인도의 푼잡(Punjab)지역 산골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지지리 가난한 고장이었다. 이상하게도 3년후 주민들은 이 집안을 캐나다에 보내기 위해서 모금을 했다. 당시도 지금처럼 정치적, 종교적으로 소란스러운 이 지역에서 왜 주민들이 모금했는지는 지금 분명치 않다. 하여튼 그들 가족은 푼잡을 떠났으나 뱅쿠버에 상륙한 것은 무려 11년 후였다. 이들을 포함, 일단의 시크인들을 실은 ‘코마가타 마루’선박은 상륙허가를 못 받아 2개월간을 바다에서 지내다가 끝내 뱅쿠버를 떠나야했다. 다행히 싱 가족은 빅토리아에 상륙이 허락되어 그의 아버지는 제재소에서 일했고 아들 샘퓨러는 급우들이 지어준 별명 스푸니라는 이름으로 그곳서 중고교를 나왔다. 주정부나 연방법은 이들을 공공장소에서 격리했고 공무원도, 선생도, 회계사, 변호사, 약사가 될 수 없었다. 일본인, 중국인이 받은 차별 그대로였다. 당시 캐나다는 인도인이 몰려오는 것을 ‘브라운 침략(Brown invasion)' 또는 ’힌두 침략‘이라 부르면서 알러지 반응이었다. 갈색이라는 뜻의 ’브라운‘은 한국, 중국, 일본인들을 ’노랑이(Yellow)‘라고 하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도인들은 극동인들보다 더 한 차별을 받았다. 브리티쉬 콜럼비아에 들어오려면 1인당 200달러를 내야했다. 당시 인도인들은 하루 평균 10센트를 벌던 때였다. 1907년 캐나다는 특별법을 제정, 국내거주 극소수의 인도인들에게서 투표권마저 박탈했다. 이것이 기독교를 믿으며 ’천국‘소리를 듣던 캐나다의 참모습이었다.

이런 와중에 싱 가족이 백인일색의 빅토리아에 나타난 것이다.

스푸니는 빅토리아 극장에서 영화를 즐겼다. 그는 ‘브라운’이기 때문에 인디안 원주민이나 중국인들 틈에 끼어 발코니 좌석에 앉아야 했다. 1층석은 모두 백인 전용이었다. 마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90년대까지 어디가나 흑백인 좌석이 따로 있던 것이나 같았다.

스푸니가 학교를 졸업할 때 아버지는 사업도 실패했고 천식을 앓아 거동을 못하게 됐다. 17살 된 그는 6가족을 먹여살려야하는 소년가장이 됐다. 그러나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곧 지붕재료 싱글을 만드는 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한편으로는 땔 나무를 가정집에 배달해주는 사업을 위해 트럭을 사려고 어려운 중에서도 열심히 저금했다.

그가 공장에서 조장(foreman)이 되자 일꾼들은 당장 보따리를 싸고 나갔다. ‘힌두’ 밑에선 일을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스푸니는 밤 반으로 옮겼고 그는 작업개선을 통해 실적을 크게 올렸다. 생산량이 늘어 봉급이 늘자 낮 반 일꾼들은 힌두라고 배척하던 스푸니 가 있는 밤 반에서 일하겠다고 제의했다.

스푸니는 점차 사업을 넓혀나갔다. 그는 자신이 제재소를 설립했고 벌목회사를 운영했다. 결과적으로 여러 번 파산선고를 받았지만 54년에는 4 베드룸 큰 집을 지을 만큼의 돈을 모았다. 이때쯤 그는 가족중매로 배우자를 만났다. 그는 보호자가 따라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데이트라도 해서 서로 알기 전에는 결혼할 수 없다고 고집했다. 임업은 변덕이 심해 잘 되다가도 망하기도 하는 사업이었다. 그는 사업을 다변화 시켰다. 놀이터 파크를 사서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후에 박물관을 차린 후 기자들과 자주 인터뷰, 공짜 광고를 얻곤 했다. 그는 타고 난 선전꾼이었다. 당시 날리던 재즈맨 루이 암스트롱을 초청, 박물관 안에서 트럼펫을 불게 했다. 이 사진이 여러 신문에 게재되자 박물관의 인기는 더 올라갔다. 박물관은 영화배우 크락 케이블, 진 해로우, 찰리 차프린, 루돌프 발렌티노를 전시했다. 후에는 소니 앤드 쉐어 등 TV와 팝 음악계의 유명인들을 추가했다. 68년 마틴 루터 킹이 암살 당하자 그의 초상을 불과 몇 주 만에 세웠다. 이런 점이 다른 동업자들과 달랐다. 그는 생각과 행동이 빨랐다. 그는 영화 찍을 때 쓰던 소품들도 사들여 전시했다. 이중에는 ‘플레이보이’ 잡지 창간자 휴 헤프너의 파자마도 있었다. 방문객들은 물건을 수도 없이 훔쳐갔다. 이중에는 간디의 안경, 윈스톤 처칠이 피던 시가, 육체파 여배우 라켈 웰치의 브라지어도 있었다. 드러머 링고 스타(Ringo Starr)의 오른팔도 없어졌다. 이 소식이 미디어로 전해지자 효과가 좋은 공짜 선전이 됐다. 비틀즈 상에는 늘 립스틱이 묻어있어서 종업원들이 자주 닦던 시절이었다. 그는 박물관 외에 멕시코 금광개발권, 칼리포니아 농장 등을 샀다. 헐리웃에 극장도 사고 두 번째의 왝스 박물관도 열었다.

좁고 더럽고 먹을 것도 없는 배에 목숨을 의지하고 태평양을 건넜고 뱅쿠버에 도착해서도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2개월간 배안에 갇혀 있던 싱은 어려서 동경하던 많은 배우들과 친해졌고 재산도 일궜다. 인간승리였다.

스푸니 싱: 1922년 인도 푼잡 태생.
작년 10월, 84회 생일을 이틀 앞두고 심장질환으로 사망.
63년간을 함께 한 부인과 4남2녀를 남겼다.

by 100명 2007. 5. 22. 0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