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15)
사회의 공복(公復), 교사 토마스 쇼야마(Thomas Shoyama(1916-2006)


트뤼도, 죤 터너, 장 크레치앵 등 3명의 연방수상 고문역


토마스 쇼야마는 ‘왜놈’, 즉 ‘잽’(Jap: 일본인 Japanese를 경멸해 부르는 말)이란 소리 속에서 자랐다. 평범한 회계사 지망생이었으나 30년대 브리티쉬 컬럼비아주(B.C.)에서는 이런 모욕이 문제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캐나다교육을 받았건 안 받았건, 중국인이거나 일본인 종자면 주류사회, 정계나 정부에서 그들은 ‘잽스’, ‘차이나맨’이었다. 신문제목조차도 그랬다.

▲ 교수시절의 쇼야마. 세계2차대전의 와중에 수용소에 수용되면서도 일본인의 자긍심을 잃지 않았고, 그후 캐나다의 경제부흥과 사회복지의 확대를 위해 크게 기여했다. 말년에는 교수로서 명성을 날리며 후학양성에 힘썼다.
“보통 아시안들의 생활수준은 백인들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백인보다 낮은 급료를 받아도 편안하게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주의회는 그들이 우리 주에 더 이상 유입되는 것을 절대로 반대한다”고 BC주 의회는 35년 결의했다. 그땐 이민자들이나, 특히 극동지역(중국, 일본)에서 온 이민자들의 캐나다 태생 자손이더라도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직업인이 될 수 없었다. 막일꾼, 하인들, 가게경영 같은 일들만 그들에게 열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쇼야마는 회계사가 될 수 없었다. 대신 그의 인내심은 온갖 역경에 불구, 그를 뛰어난 인물로 만들었다. 타미 다그러스(Tommy Douglas: 사스카치완 주수상, 후에 캐나다연방의 의료보험, 국민연금, 실직수당 제도 등을 수립한 서민의 ‘아버지’)의 최측근 고문, 트뤼도 수상 밑에서 차관, 빅토리아대학교(BC주 빅토리아 소재) 교수 등을 지낸 훌륭한 인물이 됐다. 그는 자기 종족들을 불법적이고 천박하게 대한 국가에 크게 공헌했다.

1870년대 일본이 계급에 따른 특혜제도를 없애자 그의 사무라이 선조들은 조국을 등지고 살 곳을 찾아 나섰다. 아버지 쿠니타로는 BC주 캠루프에서 빵가게를 경영했다. 이 가게는 20-30년대 철도공사 인부들 간에 인기가 높았다. 이 중 한 사람이 뱅쿠버에서 온 앤디 존슨이었다. 쿠니타로는 존슨과 계약을 맺었다. 아들 쇼야마가 뱅쿠버에서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존슨의 집에서 무료로 하숙한다. 대신 쇼야마는 존슨의 집안일을 거들어 준다는 것이었다. 매년 여름 쇼야마는 펄프공장을 포함, ‘투 잡’을 뛰면서 학비를 벌었고 38년 UBC를 졸업했다. 경제학과 회계학의 복수 전공이었다. 만약 그가 백인이었다면 그만한 학력이라면 즉시 취직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취직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39년 그는 인종차별의 쓰라림을 어루만지며 ‘뉴 Canadian’(한국어 토씨 pls)이라는 막 창간된 일본계 신문의 영어편집장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누리던 평범한 생활은 41년12월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다음해 일본인들의 재산은 모두 압류되고 모두 특별수용소에 강제수용됐다. 나치에 쫓긴 유태인 신세, 다만 아우슈비츠 같은 죽음의 캠프가 없었을 뿐이었다. 일본은 적국이고 캐나다의 일본인들은 적과 내통할 가능성이 많으므로 경계대상이라는 이유였다. 그의 신문은 BC주 카스로(Kaslo)라는 황량한 집단수용소로 옮겨졌다. 쇼야마는 정부검열관들의 폐간 협박 속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신문을 중단없이 찍어냈다. 이들은 캐나다의 전쟁상태를 절대 지지해서 충성을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인종차별을 맹렬히 비난했다. 또한 신문은 일본 교민들이 희망을 잃지 말라고 강조했다.

“당시 우리는 교민들의 사기진작을 위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우리는 교민들에게 ‘보십시오 여러분,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지만 낙담하지 맙시다. 우리가 가진 힘, 자존심, 일본인의 위신을 유지합시다.”고 신문은 주장했다.

전쟁 말기 그는 캐나다 육군으로 입대, 1년간 정보부대에서 근무하다가 46년 제대하면서 르자이너에 사는 친구 조지 타마키를 방문했다. 그땐 몰랐지만 이것이 그의 인생 코스를 변경시켰다.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던 타마키는 사스카치완주의 CCF(Co-Operative Commonwealth Federation 정당) 사회주의 정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타마키는 쇼야마와 함께 타미 다그러스 수상의 연설을 들으러 갔다. 갓 제대한 젊은 청년은 수상 연설에 감복, 주정부에서 일하기를 소원했다. 타마키는 정부집행위원회의 경제고문 탐 매크라우드(McLeod)와의 인터뷰를 주선했다. 매크라우드는 BC주 당 간부들의 반대에 불구, 그를 즉시 채용했다. 1947년 뱅쿠버 선 신문은 사스카츄완의 상태를 간결 명료하게 표현했다; ‘CCF 당 주정부가 ‘잽’들에게 직장을 준다(‘CCF Government Opens Posts to Japs')

“쇼야마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주정부 여러 분야에서 즉시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영어구사력은 뛰어났다. 그는 각료들에게 보내는 메모나 다른 중요문서 작성을 자주 부탁 받았다. 누구도 그보다 더 잘할 수 없었다.”

역동적이고 아이디어가 풍부한 더그러스 수상 밑에서 주정부의 효율성과 경제성은 전국에서 소문났다. 경제조사원 정도로 주정부에서 일을 시작한 후 점점 많은 책임을 맡은 쇼야마는 50년 경제자문위원회 겸 기획위원회 장(장관급)으로 피임, 주의회 쪽 관료조직의 최고책임자가 됐다. 정부쪽을 담당하는 재무위원회(Treasury Board: 주정부 공무원의 임면, 봉급사정 담당) 장관은 알 존슨. 이들의 우정은 그 후 30여 년간 계속됐다.

“‘우리는 분야가 달랐지만 언제나 따로 일하지 않고 함께 했다.” 오타와 거주 존슨의 말이다. 쇼야마의 능력은 국영기업체의 효율적 운영을 유도하고 이윤창출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59-61년에 다시 한번 명성을 날렸다. 47년에 시행된 주정부 건강보험을 전국으로 확대한 것이다. 더그러스 수상은 전면에서 정치적으로 싸우는 뒤에서 쇼야마와 존슨은 분과위원회나 입법과정의 문제점을 조용히 해결했다. 더그라스 수상은 그를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사람, 그러면서도 냉정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동정하는 따듯한 마음을 가졌다”고 평했다. 다재다능하며 융통성 있는 성격은 더그러스가 막 창당된 신민당(NDP)의 전국당수가 됐을 때도 드러났다. 다른 정치가들이 보란 듯이 비행기를 임대, 선거운동 할 때 당의 금고는 11만6천달러가 전부였다. 그는 일반인처럼 줄서서 상업비행기를 탔고 수행원으로는 한 사람 뿐이었다. 바로 쇼야마였다. 그는 선거운동 전략가이자 공보관 겸 짐가방 챙기는 비서였다. 오타와에 온 쇼야마는 4년만에 재무부(Dep't of Finance) 차관보조관으로 승진했고, 74년에는 3명의 유명한 재무부 장관; 존 터너(후에 연방수상), 도날드 맥도날드, 장 크레치앙(연방수상) 밑에서 차관을 지냈다. 트뤼도수상의 특별고문도 지냈고 캐나다원자력위원회(AECL) 회장을 거쳐 80년에 은퇴했다.

은퇴는 그에겐 새로운 시작이었다. 고향 BC주로 돌아가 빅토리아대학교의 아시아 태평양 학과의 방문교수가 됐다. 대개 1-2년 만에 끝나는 방문교수(Visiting professor)관례에서 벗어나 그의 ‘방문’은 91년까지, 10여년 간이나 계속됐다. 교수로서도 비범했던 것이다. 대가는 연봉 1달러와 연구실 1개. 그는 98년까지 논문을 지도했다.

by 100명 2007. 5. 22. 0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