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14)
독재자 사담 후세인 (Saddam Hussein), 1937-2006


스탈린 모방한 잔인한 독재자, 고졸 학벌의 교활한 기회주의 성격


사담 후세인의 자서전은 많이 발간되지 않지만 그는 수년간 정치학의 연구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개발도상국의 독재자의 한 타입으로, 30년이 넘도록 정치적 파워를 유지시켰고 스스로 파멸해 갔다.

▲ 전형적인 독재자의 길을 걸어온 사담 후세인은 교활하고 잔인한 수법으로 권력을 쥐고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면서 이라크를 지배했다. 미.영연합군에 의해 체포된 그는 3년이 지난 작년 12월 3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평범하며 눈에 띄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의 본보기였던 스탈린은 의식적인 경쟁자 이상이었다. 그는 이미 근본, 기질, 방법까지 닮아있었다.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그는 다른 20 세기 전제 군주와는 달리 지적인 능력, 카리스마, 구세주 같은 헌신과 열정이 부족했다. 그는 단지 폭력적이고 잔인한 살인마였고 멍청하지만 교활한 기회주의자이자 회색분자였다.

사담은 그의 삼촌집에서 가까운 마을 Owja에서 태어났다. 소작인 아버지 후세인 알-마지드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떴고, 그의 어머니 사바는 세 번째 남편과 결혼하기 전까지 전 자식을 돌볼 수 없었다. 의붓아버지 하산 이브라힘은 유목민의 전통에 따라 그를 엄하게 훈육했다.

징벌을 위해 막대기로 의붓 아들을 내리치기 일쑤였다. 어린 시절부터 후세인은 스탈린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에게 세상은 흉악하고 살아 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곳이었다. 파괴 당하기 전에 먼저 남을 파괴해야 하고 자신만을 믿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어린 시절의 고통은 그 자신뿐 아니라 전세계인을 고통으로 이끌었다. 스탈린처럼 그는 그의 감정을 냉정함의 두꺼운 벽 뒤에 숨겼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가 미워한 세상에 대한 탐욕스러운 복수심이 가득했다.

다른 아이들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서 어린 사담은 쇠막대기를 기지고 다녔다. 후에 이유 없이 남을 공격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는 쇠를 뜨겁게 달궈 동물의 배를 찌르고 반을 가르기도 했다. 죽이는 행위는 친척들 사이에서 용기를 나타내는 표징과 같았다. 그는 양치기로 첫 살해를 저질렀다. 10대였던 사담은 친구들과 함께 성년의 증거로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작은 마을은 20세기 독재자가 배워야 하는 모든 조건을 가르쳤다. 티크리트 마을은 수니파 무슬림의 중심지로 정통 수니파 아라비아인은 기껏해야 15% 밖에 안 되는 소수 민족이었지만 항상 이라크의 정치계를 지배해 왔다.

그는 군인이 아니었지만 나라를 장악하기 위해 티크리트인과 바트당원을 이용했다. 바티즘(Baathism)은 단일 아랍사회주의 국가를 건설을 목표로 하는 급진적 민족주의 교리이다. 광신적 애국 주의자로 5년간 투옥된 경험을 가진 삼촌의 강압에 의해 사담은 당에 가입했다. 그러나 그에게 바트당은 도구에 불과했지 결코 사상의 기초는 아니었다. 그는 잔인할 뿐 아니라 극도로 기회주의적이었다. 이데올로기, 정치적 입장, 전략면에서 한쪽의 극단에서 또 다른 쪽의 극단으로 심하게 변덕을 부리기 일쑤였다.

1958년 이라크 총리의 자리에 오른 카림 카셈 장군 암살 시도에 동참하면서 사담은 본격적 활동에 들어갔다. 암살은 결국 실패했고 사담은 그 과정에서 다리에 총을 맞았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영광스러운 행위라기보다 대담한 젊은 혁명가 사담에 대한 전설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1962년 이집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카이로 법과 대학을 등록한 사담은 63년 바트당원에 의해 카셈정권이 타도된 이후 이라크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6개월간 정치적 혼란상태가 계속된 후 새로운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압둘 살람 아리프가 이라크의 새 지도자로 등극했다.

1964년 바트당이 권력을 잃자 사담은 다시 체포되었고 66년 옥중에서 사담은 바트당 부총재로 선출되었다. 사담은 대통령궁을 공격하는 제 1탱크에 타고 쿠데타를 일으켜 결국 같은 바트당원 아흐메드 하산 알-바크르가 이라크의 지도자로 등극하게 됐다. 사담은 ‘새 정부에서 특정 구 정권 인사들을 신속하게 축출해내는 작전의 책임자’ 였다고. 1969년 사담이 공식적으로 혁명지휘위원회(RCC) 부위원장으로 임명돼 실질적으로 알-바크르 정권내 서열 2위에 올랐다. RCC는 국내 정치 조직으로 대부분의 이라크 정책을 결정하는 역할을 했다. “탱크를 몰고 들어가 정부를 전복하는 우리의 행보에 맞서는 자에게는 어떠한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그는 점차적으로 군대의 힘에 의존해 갔다.

72년 사담은 이라크 내 석유회사들의 국유화 작업을 지휘했고 쿠르드족 자치법안을 고안, 실시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라크 정부측이 일방적으로 실행한 이 법안에 따라 이라크 북부 지역에 거주하는 쿠르드족들의 자유가 상당부분 제한됐다. 쿠르드민주당(KDP)은 이 법안을 반대했고 결국 이라크 정부는 이라크계 쿠르드족들을 상대로 잔혹한 공격을 감행했다.

1979년 오랜 기간에 걸쳐 권력을 다진 사담 후세인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 당시 알-바크르는 공식적으로 질병 때문에 하야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사담은 본인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자신에게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약 4백 명의 바트당원들을 처형하며 바트당을 재정비 했다.

1980년 이라크와 이란 국경부근에서 일련의 사소한 충돌이 벌어져 결국엔 이라크 대 이란 전면전이 벌어졌다. UN에 따르면, 이라크는 81년과 84년 사이에 이란 병사들에게 화학가스와 신경가스를 살포했다고 발표했다. 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채 종결됐다. 같은 해 사담정권은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거주지역에 군사 공격을 감행했고 화학무기 살포, 대규모 사형집행, 강제 재배치 등이 행해지면서 10여만 명이 희생됐다고 미 국무부가 발표했다. 1990년 이라크 군대가 주변국 쿠웨이트를 침공, 점령했다. 1991년 미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쿠웨이트에서 이라크 군대를 몰아냈지만 이라크 정권교체까지 요구하지는 않았다. 사담은 휴전에 합의했고 이 협정에 따라 이라크는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 종결, 이라크 남부북부에 비행금지구역 설정, 경제제재 조치 등 다양한 조치를 받아들이라는 요구를 받았다. 95년 UN이 ‘석유-식량’ 프로그램을 실시함으로써 이라크는 식량 및 생필품 수입을 위해 석유를 수출 할 수 있게 됐다. 사담이 다시 이라크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96년 이라크 군대는 쿠르드민주당(KDP)과 연합해 이라크 북부 비행금지구역에서 군사 작전을 개시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이라크 남부 방공시설에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다. 98년, UN은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 내 화학, 생물학 무기 및 핵무기 존재 유무를 점검하는 사찰단의 활동을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무기 사찰단을 이라크에서 철수시켰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군대는 4일간 공습을 감행했다. 또한 미의회는 사담 정권을 전복시키고자 ‘이라크 해방법’을 통과시켰다. 2002년 사담과 부시 미국 대통령간의 설전이 계속돼 양국간의 군사적 대결이 발생할 처지에 놓였고 부시는 그 해 1월 연두교서에서 이란, 북한과 더불어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공공연히 ‘정권교체’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한편 사담은 부시의 정책을 비난하고 10월 연설문에서 “피는 더 많은 피를 부를 뿐”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의 붙잡음과 그의 실행 사이에서 어제 통과되는 3 년. 정보 소식통, 미군에서 내보를 따르는 2003년 12월에서는 그를 그의 생활이 시작되었었던 Tikrit의 가까이에 농장에 지하 피난에서 숨기는 찾아냈다. 그가 이라크 구금으로 옮겨지기 전에 내년의 중앙이었다, 7월 2004일에서 전직 대통령은 형사 입건을 듣는 법정에서 것처럼 보였다. 실행이 1982년에 Dujail의 Shia 작은 도시에 있는 대학살과 관련있을 조사로 진행하게 준비되어 있을 전에 통과되는 다른 년. 2005년 10월에서 열린 마지막에 예심 및 절차는 즉시 연기되었다. 2 달 더 이른 그의 법적인 팀을 자루에 넣었었던, 사담은 순결을 변론했다. Anfal 1988년 캠페인에 관하여 전쟁 범죄 책임에 두번째 예심은 8월 21일에 올해에 열었다. 그는 청원을 제출하는 것을 사절하고, 그의 더 이른 외관을 법정에서 성격을 나타낸, 까만 익살극의 에피소드는 법원에서 그의 중지 및 4 시간 그 분출하기 때문에 그의 마이크의 재판관 엇바꾸기와 더불어, 재발했다. 예심은 10월 11일에 연기되었다, 그러나 11월 5일에 법원은 유죄 평결의 아래 수교하고 죽음에 걸어서 사담을 선고했다.

1937년 4월28일 이라크 작은 마을 Owja 출생
2006년 12월30일 바그다드에서 사형집행(향년 69세)
유가족 부인 사이다, 아들 우데이와 쿠세이(2003년 미군에 의해 사망), 딸 세 명.

by 100명 2007. 5. 22. 0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