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13)
소울 음악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 (James Brown), 1933-2006


약물복용, 총기등 거친 사생활불구 영원한 음악인


제임스 브라운은 스스로를 ‘연예계에서 최고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 자칭하며 50년이 넘도록 음악인으로 살아왔다. 그는 ‘미스터 다이나마이트’, ‘소울 브라더 넘버원’, ‘슈퍼 헤비 펑크의 전도사’, ‘소울음악의 대부’로 통했다. 그의 음악은 열정적이면서 복잡하고, 절제되어있으면서 거침없고, 호색적이면서도 사회적으로 깨어있다. 셀 수 없이 많은 불후의 히트곡을 가진 브라운은 팝문화의 초석으로 탄탄히 자리잡아갔다.

▲ 우리시대의 진정한 소울가수이자 뮤직 아이콘 제임스 브라운이 작년 크리스마스에 세상을 떠났다. 다소 험난한 삶을 살았음에도 아티스트로서의 그의 삶은 너무도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그는 치과에 정기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종합검사를 받아보라는 치과의사의 권유를 받고 토요일에 입원했고 그때 자신이 폐렴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그의 건강상태는 사망할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았다. 주중에 잡힌 공연 스케줄은 모두 취소했지만 뉴욕 비비킹 나이트클럽과 뉴저지의 새해맞이 공연을 강행하고자 의사의 특별허락을 받았다. 아쉽게도 1월에는 캐나다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 계획이 있었다.

그는 늘 ‘나는 연예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야. 나는 결코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아’라고 팬을 향한 헌신의 마음을 전했다.

1965년 앨범 ‘Papa’s Got a Brand New Bag’를 히트시키면서 펑크음악을 대중적으로 소개했는데 그의 음악은 아프리카와 미국문화에 동시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I Got You(I Feel Good), Cold Sweat, Get Up(I Feel Like Being) Sex Machine’과 ‘Hot Pants’와 같은 노래는 모든 악기를 타악기로 사용, 대조적인 리듬을 가지고 재즈를 연주하여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춤추도록 했다. 그의 새로운 음악은 1970년대의 소울, 리듬 엔 블루스와 그 이후 대대적인 인기를 끈 힙합음악으로 발전되어갔다. 1970년 그가 유행시켰던 펑크 드럼비트는 힙합 리듬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믹 재거(Mick Jagger)와 마이클 잭슨은 그의 현란하고 빠른 발동작, 무릎 낙하, 다리를 찢는 춤동작을 모방했고, 많은 가수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그는 1960년대 대중에게 정치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1968년 노래 ‘Say It Loud-I’m Black and I’m Proud’로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부각시켰다. 하지만 1972년 그는 리차드 닉슨 대통령의 재임을 지지하는 등 그의 정치적 입장은 다소 짐작하기 어려웠다.

브라운은 거친 삶을 살았다. 청소년 때뿐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감옥에 수 차례 들어갔다. 그는 구두를 깨끗하게 닦지 않거나 노트를 잃어버리는 밴드 멤버에게 벌금을 과할 만큼 일 처리가 엄격한 사람이었다. 1960년대 말, 그는 자신의 출판사와 3개의 라디오 방송국을 운영하는 경영자였다. 그 와중에도 일년에 51주를 넘게 공연을 해왔다.

그는 1933년 5월3일, 사우스 캐롤라이나 반웰의 판자 집에서 태어났다. 산파의 말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때 모두 사산아로 생각했다는 것. 그러나 그의 몸은 점점 따뜻해졌고 그는 결국 건강하게 살아 남았다. 4년 뒤, 그의 부모가 별거를 시작 하면서 그는 아우구스타에서 매춘업소를 운영하는 친척에게 보내졌다. 어린 나이에 군인 앞에서 춤을 춰 푼돈을 벌었고 구두를 닦고 천 쪼가리를 주웠다. 옷이 너무 낡고 더러워서 학교로부터 퇴학 당하기도 했다.

그는 1949년 차문을 따 물건을 훔친 이유로 3년형 선고를 받았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가스펠 그룹에서 노래를 불렀고 출감 후, 그는 바비 버드가 이끄는 교회음악모임 ‘가스펠 스타라이터’에 가입했다. 모임은 ‘프레임’으로 이름을 바꿨고 브라운은 드럼을 쳤다. 그러나 그의 파워풀한 목소리와 광적인 댄스 때문에 바로 리드 싱어로 발탁되었다.

1963년 브라운은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발라드곡 ‘Prisoner of Love’로 팝차트 20위에 처음으로 진입했다. 제임스 브라운과 프레임은 1960년대 내내 쉬지 않고 투어공연을 했다. 그들은 1965년에 ‘The T.A.M.I Show’에 참여했고 믹 재거가 이를 보고 그의 댄스를 배웠다고 한다.

1960년대 시민운동이 한창 벌어질 때, 브라운은 그의 음악과 명성을 이용하여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1966년 그는 앨범 ‘Don’t Be a Dropout’을 발표하고 퇴학방지관련 발의권을 통과시키기 위해 부통령 허버트 험프리를 만났다. 2년 후, 노래 ‘Say It Loud-I’m Black and I’m Proud’에서 “우리가 가치를 인정 받을 때까지 결코 우리의 행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968년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총살당했을 때, 브라운은 보스턴에서 공연약속이 잡혀있었다. 그는 공연을 취소하지 않고 대신 생방송중계를 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60년대 말까지 그의 음악은 팝, R&B, 재즈의 한 부분으로 ‘Sly’, ‘패밀리 스톤’, ‘템테이션’, ‘마일즈 데비스’의 음악에 영향을 끼쳤고, 아프리카 리듬을 이용한 펑크뮤직은 음악계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70년대 초, 그의 음악으로 댄스홀이 가득 찼고 그는 직접 흑인영화음악도 제작했다. 1974년 자이르에서 열린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어맨의 복싱 경기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디스코음악의 출현은 그의 음악을 40위권 밖으로 내몰았지만 1980년 ‘블루스 브라더스’의 데뷔로 또다시 재기했다. 1985년 그는 팝히트송 ‘Living in America’로 4위를 차지했고 영화 ‘로키4’에 그의 노래가 삽입됐다. 그 해, 그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의 공연자 부분에 선정 되었다. 당시 힙합이 생겨나고 그의 음악은 L.L. 쿨 J와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 음악 비트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난잡한 사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공연을 해왔다. 1970년대 450만 달러의 세금을 횡령 했고 결국 제트기와 라디오 방송국이 팔렸다. 1973년 장남 테디는 차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1987년 그는 PCP약물을 복용한 상태로 아우구스타 자신의 사무실 근처에 가는 중, 경찰에 의해 남부 캐롤라이아 경계까지 추격당했다. 그는 공공장소에 위험한 총기를 소지했고 약물복용상태로 운전하며 경찰을 피해 도망한 이유로 교도소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1991년 출감했다. 1998년 그는 또 라이플총을 발사하고 경찰의 추격에 쫓겨 90일간의 약물재활 프로그램에 보내졌다. 2003년 그는 사면되었으나 2004년 전직 대리가수인 네 번째 부인 토미 래 하이니를 폭력한 혐의로 또다시 구속되었다. 약물복용과 범죄사실에도 불구하고 음악 아이콘으로서의 그의 명성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는 1992년에 그래미 평생공로상, 2003년에 캐네디센터 명예상을 수상했다.

1990년 제임스 브라운은 뉴욕 타임즈 인터뷰에서 “나는 항상 현재보다 25년을 앞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1933년 5월3일 사우스 캐롤라이나 반웰 태생
2006년 12월25일 폐렴으로 인한 충혈성 심장마비로 사망
유가족 넷째 부인 토미 하이니와 다섯명의 자녀

by 100명 2007. 5. 22. 0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