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12)
기업전략가 - 얼 주드리 Earl Joudrie(1934-2006)


기업에선 이름난 구조전략가, 결혼생활은 F학점


외부 사람들은 전혀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결혼생활이 있다. 비즈니스맨 얼 주드리와 그의 아내 도로시의 사생활은 1995년 캘거리 주택가를 놀라게 한 6발의 총소리와 함께 전면 공개됐다. 도로시는 남편의 오랜 학대와 폭력을 폭로, 세상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 탁월한 기업전략가였던 얼 주드리는 부인과의 원만하지 못한 결혼생활로 고통을 받았지만 재혼 후 평온을 찾았고 캐나다 기업사에 남을 업적을 남겼다.
거의 40년이 넘은 그들의 결혼생활 뒤편에 무엇이 숨겨져 있었을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살인혐의로 사건이 재판에서 논란될 때 주드리는 도로시와 주장을 다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도로시는 남편의 앞이 아니라 등을 향해 총을 쐈다. 이유는 주드리가 폭력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와 이혼을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주드리는 자식들이 부모의 싸움으로 입을 피해를 걱정해서 도로시가 유죄판결을 받지 않도록 그녀를 최대한 변호했다. 도로시가 쏜 4발의 총알이 몸에 박혀 있으면서도.

캘거리 출신의 주드리는 ‘캐네디언 타이어’, ‘알고마 제철(Algoma Steel)’, '돔(Dome)석유회사' 등 대기업이 재정적 난관에 처했을 때 그들을 구해낸 기업전략가요, 회사운영을 반전시킨 ‘마스터 비지내스 맨’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판결 후, 그는 부인을 학대한 남편으로 낙인 찍혔으나 업계에서의 그의 지위는 변함없었다. 친구들 말에 의하면 그는 신체적, 도덕적으로 강인한 사람이었고 보통 리더들에서 볼 수 없는 세심함과 재능도 가졌다. 그는 늘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다른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전면적으로 싸우는 것은 가급적 피했다. ‘걸프 캐나다’와 ‘캐네디언 타이어’의 이사였던 모린 사비아 역시 “그는 아량이 넓은 멘토였고 지혜롭고 명석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비록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그는 기업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능력과 확고한 신념,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얼 주드리는 가난한 농가에서 자랐다. 아버지 하버트 주드리는 사스캐추완의 농부였다. 아내가 급성폐렴으로 죽고 어린 딸까지 잃은 후, 하버트는 일자리를 찾아 에드먼튼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그는 선생이었던 도리스 쉬믹을 만나 결혼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얼과 그의 동생 케이스였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가르치는 열성적인 교육인이었다. 이들은 자주 부부싸움을 했고 결국 별거했다. 그의 아버지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이어서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기 일쑤였다. 그의 동생은 14살 때 아버지와 싸운 후 가출했고 얼은 16살에 집을 나왔다.

주드리는 당시 15살이던 도로시 조나슨을 만나 교제를 시작한 지 4년 후 크리스마스 이브에 약혼 했고 알버타 대학에서 함께 학위를 받은 후 결혼했다. 얼은 에드먼턴 심포니에서 파트타임으로 바이올린을 하며 학비를 벌었고 여름에는 탄광이나 석유채굴장에서 일했다.

1960년 그들은 에드몬턴서 캘거리로 이사했고 부인은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들은 함께 교회를 가고 성가대에서 찬양을 하는 겉보기에 완벽한 커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가 없다는 사실에서 언쟁이 잦았고 때로는 육체적인 싸움까지 했다.

1963년 딸 케롤린과 아들 콜린, 게이가 해를 이어 태어났다. 그러나 1971년 주드리는 임파선 암 호지킨병에 걸렸고 6개월 사망선고를 받았다. 그는 캘리포니아의 스탠포드 의과대학에서 치료를 받았다. 건강을 되찾은 주드리는 토론토로 이사해 몇 년을 살다가 ‘에쉬랜드 오일’의 부사장으로 발령 나서 미국 캔터키로 이주했다. 그는 비즈니스 때문에 계속 옮겨 다녔고 그때부터 주드리 부인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들의 삶은 게릴라 전쟁 같았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캘거리로 이사해 가정에 충실 하려고 노력했다. 1979년 그는 뛰어난 비즈니스 수완으로 ‘보이저 석유회사’의 회장이 되었다. 그는 어떤 비즈니스이던 간에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는 능력이 있었다. 1990년 ‘캐네디언 타이어’의 이사로 선임되었다가 결국 이사장이 되었다. 그는 비즈니스계에서는 크게 인정 받았으나 사생활은 비참했다. 집안에서 부부싸움은 계속되었다. 1989년 결국 집을 나왔지만 공식적으로 결혼생활은 문제 없는 척했다.

1992년 ‘알고마 제철’의 회장이 된 주드리는 토론토로 거처를 옮겼고 다음해 먼 친척이던 이혼녀 린 매닝과 함께 살면서 도로시와의 이혼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1995년 1월20일, 그는 캘거리로 가서 이혼장을 내밀었다. 도로시는 “이젠 정말 결혼생활이 끝났구나” 생각하는 순간 숨겨둔 총을 꺼내 그를 향해 6발 쏘았다. 차고에서 총을 맞고 쓸어진 그를 보면서 도로시는 그가 죽은 후 얼마나 많은 상속금을 받을 수 있을까, 시체를 어디다 버릴까 등 여러 생각을 했다. 피바다 속에서 허우적대는 주드리는 빨리 구급차를 불러 달라고 간청했지만 도로시는 그와 흥정을 시작했다. “살려주면 나를 좋게 증언해주겠는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주겠는가”등을 교섭했다. 주드리의 확답을 받고나서야 그녀는 911을 불렀다. 그의 목숨은 이렇게 구조됐다. 살인미수 재판에서 주드리는 극한상황 속의 약속이었지만 약속을 지켜서 피고에게 유리하게 증언했다. 물론 자녀들의 장래를 걱정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용서였다. 그는 건강을 회복했고 이혼수속은 마무리되었다. 도로시는 불과 190만 달러와 함께 2년 동안 매달 2천 달러를 받는 조건이었다. 법정에서 두 아들은 엄마의 음주와 부모의 잦은 싸움을 증언했다. 그들은 아빠가 결혼 20년간 엄마를 심하게 때려 코가 부러지고 갈비뼈가 나가고 멍이 들었다는 엄마의 주장을 변호하지 않았다. 법정은 당시의 정황을 인정, 도로시를 형무소가 아니라 알버타병원 재활원으로 보내는 경미한 형을 내렸다.

“우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렸다. 7명의 자식과 9명의 손자는 가족으로 끈끈하게 묶였다”고 현재 부인 매닝은 말했다. 6년전부터 암을 앓은 주드리가 지난달 사망하기 전 날, 그의 가족은 그가 총을 맞았으면서도 어떻게 흥정해서 목숨을 건졌는가 등 숨은 비밀을 ‘글로브 엔 메일’에 공개했다.

Earl Joudrie
1934년 3월27일 에드먼턴 태생
2006년 11월29일 사망
(향년 72세)
유가족 부인 린, 4명의 자녀,
3명의 의붓자녀, 9명의 손주

by 100명 2007. 5. 22. 0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