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11)
나치 사냥꾼 - 엘리어트 웰즈 Elliot Welles(1927-2006)


우리가 본받아야할 나치전범 사냥꾼


우리의 부모, 부모의 부모를 못살게 굴고 학대, 참살한 일본인 범죄자들은 다 어디 갔나? 그들을 추적하는 집요한 탐정은 왜 없는가? 유태인들과 너무 비교되지 않는가?

▲ 엘리어트 웰즈의 끈질긴 노력으로 수많은 나치들은 법정에 서야했다.
엘리어트 웰즈는 유태인 대학살의 생존자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어머니를 죽인 나치당원을 추적해 왔다. 웰즈는 2003년 은퇴하는 날까지 브나이 브리스(B’nai Brith) 반인종주의 연맹의 감독으로 지내면서 나치 범죄자를 색출하는데 힘썼다. 그는 미국에 정착한 나치당원을 찾아내 추방하고 국제재판에 세우는 일을 가장 강력하게 추진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웰즈는 수년간 미국, 독일, 오스트리아의 먼지 쌓인 자료보관소에서 실낱 같은 정보를 찾아내어 조용히 묻혀 지내기 원하는 나치당원들의 행방을 끈질기게 추적해갔다. 그는 여러 나라의 정부가 비밀정보를 공개하고 용의자를 찾아 체포, 재판에 송부하도록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웰즈는 볼레슬라프 마이코브스키(Boleslav Maikovskis)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이코브스키는 전쟁당시 라트비아인의 체포를 명령해200명을 죽음으로 이끈 사람이다. 마이코브스키는 1965년 소련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전쟁 후 1987년 독일로 도주하기 전까지 뉴욕시 롱 아일랜드에 정착해 살았다.

웰즈는 그가 86세 되던 해인 1990년 그를 독일 재판에 기소했다. 그러나 1994년 건강상 문제로 집행유예를 받고 2년 후 사망했다.

나치당 노동자 캠프 지휘자였던 죠셉 쉬암버거는 40년간 아르헨티나에 숨어살았다. 독일정부로 인도된 죠셉은 1992년 종신형을 선고 받고 2004년 감옥에서 숨졌다.

오스트리아 쿠르트에서 태어난 웰즈와 그의 어머니 애나는 나치에 의해 리가로 추방당했다. 애나는 붙잡혀 버스에 태워졌고 그 버스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했다. 이틀 후, 웰즈는 어머니의 옷을 전해 받았다.

그는 독일에게 점령당한 폴란드의 슈트호프 집결 캠프에 보내지기 전까지 몇 년 동안 리가의 유대인 거주지역에서 지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수용자들은 독일 마그데부르크의 캠프에 보내졌다. 그는 이동 중에 도망쳐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리투아니아 코소보의 유대인 거주지의 생존자였던 씰 체이컨을 만나 결혼했다. 3년 후, 웰즈 가족은 미국에 도착했고 그는 이름을 바꿨다. ‘엘리어트’는 히브리 이름 엘리(Eliyahu)에서 따왔다.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오슨 웰즈를 좋아해 성은 웰즈(Wells)로 선택했다.

1949년 뉴욕에 정착한 웰즈는 여러 가지 고된 직업에 종사했다. 그는 햄공장에서 고기를, 설탕공장에서 설탕부대를 나르는 일을 했다. 그는 마침내 맨하튼에 있는 음식점 ‘로렐라이’에서 웨이터로 일하게 되었고 두 명의 파트너와 함께 음식점을 살 만큼 큰 돈을 벌었다.

웰즈는 그의 어머니를 끌고 간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특별수사대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독일, 오스트리아 영사관 관계자와 함께 그 사람을 수색했다. 그는 독일 정부가 기록을 공개하도록 요구했고 결국 독일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던 그를 찾아냈다. 1976년 그는 재판에 넘겨졌다. 일부 죄는 밝혀졌지만 전체 죄를 밝혀낼 증인이 충분치 않아 그는 단지 3년 형을 선고 받았다.

비록 판결이 났지만 엘리어트 웰즈는 끊임없이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1970년 후반, 그는 반인종주의 연맹 뉴욕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세계곳곳의 나치당원을 찾아 다녔다.

그는 유태인 신문에 광고를 내며 사실을 증명해줄 유태인 대학살의 생존자, 목격자를 수소문했다.

“정부당국자는 생존자들과 쉽게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았죠. 그러나 그들은 엘리어트 웰즈를 믿었습니다.”

1927년 9월 18일 비엔나 출생
2006년 12월 5일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향년 79세)
유가족 부인, 아들과 딸

by 100명 2007. 5. 22. 0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