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9)
나치에 쫓기면서도 휴식 거부한 결핵연구가

에디뜨 멘키에비츠 Edith Mankiewicz(1910-2006)



▲ 제2차 세계대전 때 얻은 결핵으로 평생 고생하면서도 90세까지 결핵퇴치 사업 및 미생물학 분야의 교수이자 연구가로써 일생을 보낸 에디뜨 멘키에비치 (1953년 당시 사진).
1930년 두 명의 여성이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왔다. 한 명은 젊은 의대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화재에 눈이 먼 결핵 환자였다. “나는 죽기 싫어요. 죽을 수 없어요. 키워야 할 아이가 있어요.” 여인은 울면서 말했다. 그러나 그 의대생은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개인적인 위험부담을 생각하지 않고 그녀는 자신의 눈물에 환자의 침을 섞으며 연구를 시작했다. “의사로써 나는 실험실에서 일했지만 언제든지 결핵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멘키에비츠 박사는 미생물학과 폐결핵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였다. 그녀는 의학도를 가르쳤고 프랑스와 중국, 캐나다에서 연구했다. 몬트리올 병원에서 일하며 100편이 넘는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 그녀는 평생 결핵 예방과 치료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독일 나치가 유태인을 탄압 할 때, 그녀는 프랑스와 샹하이로 몸을 피했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폭격과 생필품 결핍에 시달렸고 연구실에서 옮은 결핵으로 두 번이나 입원했다.

그녀는 의학 연구와 삶에 대한 열정뿐 아니라 뛰어난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몬트리올 병원에서 미생물학을 연구할 때 상관이었던 제럴드 베리 박사는 “그녀는 체구가 작았지만 강인한 사람” 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녀의 백신 연구는 결핵을 예방하는데 직접적으로 쓰였다. 처음 그녀의 연구가 발표되었을 때 그녀의 백신은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는 널리 사용되며 전염병을 치료하는데 다시 이용되고 있다. 폴란드 면역학 교수 안드레 고스키의 최근 연구는 1960년대 ‘네이쳐(Nature)’ 잡지에 실린 멘키에비츠 와 리박 박사의 연구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의사였던 맥시밀리언 메이어와 간호사 게르트루트 카울의 딸인 어린 에디뜨와 언니 마가레트가 의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33년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판사 해럴드 멘키에비츠와 결혼했다. 두 달 후, 그들은 남편이 나치당원에게 중형을 선고한 이유로 위협을 받아 프랑스로 도피해야 했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다시 공부했고 에디뜨는 리옹 대학에서 다시 의대 학위를 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그녀는 어린이 병원에서 내과의사로 일했고 1940년 딸 제클린을 낳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독일인이 직업을 갖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나찌를 보고 몇몇 아이들이 “독일 병사들이 온다”고 소리지르자 나치병사들은 단순히 경고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은 죄 없는 아이들에게 총을 쏘았다. 그녀는 아이들이 무참히 쓰러져 갔던 모습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고 회상했다.

▲ 세계대전중 중국 상하이대학에서 교수로 지내며 학생들과 함께. 가운데가 에디뜨
프랑스에서 요주의 인물로 몰리자 그들은 샹하이에 있는 프랑스인 거주지로 피신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오로르 대학에서 미생물학 교수로, 파스퇴르 학원에서 임시 책임자로 일했다. 그녀는 일본병사에 의해 강간당한 여성을 위한 부인병 서비스 센터와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입양 서비스 센터를 설립했다. 또한 유태인 의사 양성을 위한 개인 의학 연구실도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샹하이가 일본의 지배아래 있을 때, 그들은 폭격과 정전, 물자부족으로 시달렸다. 딸 제클린 스미스는 “사이렌이 멈추면, 어머니의 일은 시작됐어요. 어머니는 밖으로 뛰어나가 부상자를 치료해주었지요. 저의 아버지 역시 숨은 영웅이었어요. 엄마와 함께 어려운 일을 다 감당해 내셨지요.”

전쟁이 끝나고 멘키에비츠 가족은 몬트리올로 이주했다. 그곳에 에디뜨의 부모와 언니 마가렛 쿤슬러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캐나다에서 그녀는 또다시 의학 공부를 했다. 1947년부터 1950년까지 맥길 대학 미생물학과 연구에 참여한 멘키에비츠는 또다시 결핵환자 요양소에서 일년 동안 일했다. 또한 1951년부터 1976년까지 로얄 에드워드 체스트 병원(현 몬트리올 체스트 병원)의 연구소 책임자로 있으면서 효모 세포가 결핵 진단에 필요한 시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여 신문 머릿기사를 장식했다. 또 다른 연구에서 그녀는 암조직 속에서 균세포를 발견하기도 했다.

은퇴할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레이크쇼어 제네랄 병원의 미생물 연구소의 책임자가 되어 15년 동안 일을 계속 했다. 1962년부터 1979년까지 맥길대학에서 미생물학을 강의하며 많은 젊은이들에게 학문적 조언을 해 주었다. “그녀는 항상 바빴지만 항상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남편은 수년간 국제 민간항공협회(IATA)의 법률가로 일했고 맥길과 몬트리올 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쳤다. 그는 1993년에 사망했다.

80세에 은퇴를 하고도 그녀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학생들을 격려했고 과학전문서적을 영어로 번역했으며 종교와 정치적 이유로 감옥에 갇힌 샹하이 여성을 위한 보호소 설치를 도왔다. 그러나 1993년 남편과 아들을 잃은 슬픔이 매우 컸다. 멘키에비츠 박사는 영화감독 이었던 아들의 죽음을 추모, 어린이를 위한 비영리재단을 설립했다.

그녀는 90세에도 꾸준히 활동했다. 매일 책을 읽었고 철학을 주제로 끊임없이 토론 했다. “그녀는 아침식사를 할 때 밤새 생각해두었던 철학적 질문을 우리에게 했다.” 손녀 크리스탈 스미스는 “할머니는 정의를 위해 고집스럽게 싸워왔다”고 회상했다. 멘케비츠 박사는 나치당이 빼앗아간 그녀의 어린 시절을 보상을 받기 위해 독일 정부를 고소했고 프랑스 정부는 전쟁당시 그녀가 했던 많은 일을 기념하여 로랭의 십자가(Cross of Lorraine)상을 주었다.

Edith Mankiewicz
1910년 5월 16일 독일
라이프치히 태생
2006년 9월 21일 몬트리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향년 96세)
유가족 딸 제클린 스미스,
다섯 명의 손자/손녀

by 100명 2007. 5. 22. 0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