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8)
열정적인 사회주의 교육자 - 릴리안 로빈슨
Lillian Robinson(1941-2006)


'여성가치'창조한 학자.행동가.교육자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가 좌우명



▲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인간의 존엄성을 평등하게 존중한 릴리안 로빈슨은 캐나다 제일의 여성학 교수였고 사회주의적 패미니스트였다.
릴리안 로빈슨은 콩코디아 시몬느 드 보브아르 대학(Simone de Beauvoir Institute)의 학장으로 있을 당시 일어난 작은 사건을 이야기했다. 집에서 문서작업을 하고 있는데 거실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니 도둑이 창을 깨고 안으로 기어 들어오는 것이었다.

"누구세요?"
"피터요."
"여기에 왜 들어 왔나요?"
"나는 20달러가 필요해요."

그녀는 현금이 없어서 그에게 수표를 써주었다. 남자는 얼떨결에 수표를 받아 들고 밖으로 다시 나가려고 창문 쪽으로 걸어 갔다. 그러나 그녀는 비록 그가 집을 침입해 들어온 도둑이지만 정정당당하게 정문으로 나가도록 배려했다.

이 이야기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학자 로빈슨의 성향을 잘 드러내주는 에피소드이다. 그녀는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의 물건을 훔칠 도둑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크고 둥근 안경, 느슨하게 묶은 회색 머리의 그녀는 적극적인 여성 운동가였다.

그녀에게 좌우명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Bring it on)”이었을 거라고 친구들은 말했다. 2001년 11월, 캐나다의 가장 오래된 여성학 프로그램의 학장으로 임명 받고 몬트리올에 도착했다. 그 후, 로빈슨은 이스라엘 영사관 앞에서 매주 금요일 데모를 주최했던 유태인 연합(Jewish Alliance Against the Occupation)의 설립을 도왔다. 2002년 9월, 그녀는 이스라엘 총리 벤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의 연설을 저지하기 위한 시위에 참가한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처리를 당한 학생들을 지지한 몇 명 안 되는 대학 행정관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동기생의 대부분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릴리안은 그녀의 제자들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듯 했다. 그것은 가족 그 이상의 관계처럼 보였다”고 그녀의 제자 에밀리 비팅은 말했다. “이들은 나의 친자식은 아니지만 나의 친구이자, 지원자이고, 동지”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릴리안 사라 로빈슨은 유태인 거주가 허용된 러시아 서쪽 국경 지대에서 온 이민자의 딸이었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 그녀의 부모는 뉴욕에 정착했다. 그녀의 아버지 어빙은 사진 프레임 공장의 감독이었고 어머니 파니는 경리직원으로 일했다. 삶은 힘들었다. 그러나 릴리안의 아버지가 위궤양 수술을 받고 병이 악화하여 사망한 1945년, 생활은 더욱 더 어려워져 갔다.

슬픔에 잠긴 어머니는 그녀의 쌍둥이 자매가족과 함께 방 두 개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다. “사실, 이모 릴리안은 과부의 딸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여성 운동을 시작하면서 많은 동지를 얻게 되었고 큰 가족을 이루게 됨을 행복해 했다”며 퀘벡 몬트리올 대학 역사학 교수인 조카 그렉 로빈슨은 회상했다.

릴리안은 엘리트 뉴욕 고등학교를 다녔고 그곳에서 로드아일랜드에 있는 브라운 대학 장학금을 탔다. 릴리안은 총명하고 카리스마가 넘쳤으며 젓가락처럼 말랐었다.

로빈슨은 뉴욕 대학에서 예술역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콜럼비아 대학에서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6세기 서사시 문학에 나타나는 여성 기사를 연구한 그녀의 논문은 나중에 책 ‘괴수정부(Monstrous Regiment)’로 발간되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그녀는 행동파 그룹(민주사회를 위한 학생모임)에 가입하여 반전 운동을 펼쳤다. 사회 정의와 인권 문제에 관련한 그녀의 적극적인 개입은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또한 그녀는 필리핀 여자 간병인들이 이주 노동자 센터에 가입하도록 격려했다. 파업을 할 때도 자금이 여유롭지 못한 필리핀 노동자를 도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녀는 ‘체다카(tzedakah, 자선)’라는 유태인 개념을 삶으로 실천했다”고 그녀의 조카 그레그는 말했다.

로빈슨은 1969년 메사츄세스 공과대학에서 여성학 강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대학원생 데이비드 길든과 사랑에 빠졌고 바로 결혼하여 아들 알렉스 로빈슨-길든을 낳았다.

20년간의 결혼기간 동안 뉴욕-버팔로와 파리를 오가며 일했고 샌프란시스코의 “황무지 같은 대학”에서 긴 세월을 보냈다. 비록 그녀는 15년 이상 정규직 일을 찾지 못했지만, 그녀는 항상 바빴다. 그녀는 계속 임시직으로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고 법원 통역원으로, 시인으로, 추리소설 작가로 일했다. 1998년 추리소설 ‘Murder Most Puzzling’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혼을 한 로빈슨은 고독했지만 더 이상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았다. 조카 그렉은 그녀가 택시에 스카프, 지갑, 모자 등 물건을 놓고 내리는데 이는 모두 공허한 마음에서 오는 습관이라고 했다.

그녀의 제자였던 마니 켈리슨이 연극 ‘버자이나 모놀로그’의 무대감독으로 있을 때, 로빈슨은 상처 깊은 인생을 산 늙은 부인의 역할을 맡기 위해 오디션장에 왔다. “릴리언의 뛰어난 재치와 절묘한 센스에 관객은 감동했다”며 켈리슨은 말했다.

“그녀는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여성으로서 가치가 얼마나 큰 지 깨닫게 했다. 나는 무언가 도전할 때마다 그녀를 생각할 것이다.”

1941년4월 18일 뉴욕 태생 2006년9월 20일 난소암으로 몬트리올에서 사망(향년 65세) 유가족: 아들 알렉스, 형제: 에드 로빈슨, 프리다 포스트 조카: 그렉 로빈슨

by 100명 2007. 5. 22. 0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