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7)
BC주 CBC의 전설적 방송인 - 수잔 잉글버트
Susan Englebert (1946-2006)


비서로부터 프로듀서, 최고 경영자까지


▲ 비서로 출발한 수잔 잉글버트는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CBC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발견했다. 걸출한 방송인으로, 고위 행정관으로 일한 그녀는 문제가 닥쳤을 때 항상 긍정적으로 해결해 나간 유능한 경영자였다.
수잔 잉글버트는 CBC에서 30년 넘게 일한 열정적인 방송인이었다.

프로듀서에서 고위급 관리가 되기까지 긴 여정에서 잉글버트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동료들의 숨겨진 재능을 키워주었다. 그녀는 존경 받는 동시에 사랑 받은 보기 드문 매니저였다.

수잔 잉글버트의 가족은 영국에서 이민해 빅토리아에서 살다가 1950년 온타리오 남부에 정착했다. 아버지 레니는 잉글랜드 출신이고 어머니 위니프레드는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작가였다. 17년간 회계사 잡지사에서 일한 그녀의 어머니는 CBC극본을 썼을 뿐 아니라 때때로 연기도 했다.

수잔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부모는 그녀가 기술을 익혀 전문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설득해 비서가 되는 훈련을 받기로 결정했다. 1961년, 그녀는 헴스테드(Hampstead)에 있는 세인트 고드릭(St. Godric) 비서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런던으로 떠났다.

스윙이 유행하던 60년대의 런던은 모든 문화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잉글버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모두 너무 젊고 감수성이 풍부했다” 그녀의 평생 친구였던 린다 스파이커만이 그 때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수잔은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예술에 흥미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프랑스 페미니스트 시몬 보브아르(Simone de Beau-voir)와 색소폰 연주자 소니 롤린즈(Sonny Rollins)를 나에게 소개 시켜줬다.”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고 캐나다로 돌아오기 전까지 런던에 머물며 가디언 신문사에서 비서로 일했다. 그 후, 그녀는 CBC 음악국 비서로 취직하여 토론토로 이주하게 됐고 캐나다 최고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n Gould)와 함께 일했다.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한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열정은 더욱 커져 보다 전문적 기술을 얻기 위해서 변호사 비서가 되기로 결심했다. 1970년 초, 래드너 다운스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하여 벤쿠버로 이주했다. 그러나 국내 음악가이자 프로듀서인 클레어 로렌스는 그녀를 방송국으로 영입했고 제작자 테리 멀리건과 함께 프로그램 ‘The Great Canadian Gold Rush’를 맡아 일하게 되었다.

“수잔이 프로듀서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진짜로 빛을 발했다”며 그녀의 남동생인 마이클 잉글버트가 말했다. “그녀는 당시 락음악을 즐겨 들었지만 사실은 재즈를 더 좋아했다.”

‘The Great Canadian Goldrush’는 가수들이 함께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는 유명한 크리스마스 쇼였다. 로이 포브스(Roy Forbes)는 그의 힛트송 ‘Mince Meat Tart’를 소개해 준 것에 감사해 웹사이트에 감사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수잔과 비키 가베로(Vicki Gabereau)는 오랜 기간 동안 회사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잉글버트는 비키와 함께 프로그램 ‘버라이어티 투나잇’과 2시간 토크쇼 ‘가베로’를 제작했다. “수잔은 방송계에 없어서는 안될 감초와 같았다. 밝고 선명한 목소리와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무엇이든지 시도했다. 또한 그녀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내가 인터뷰를 할 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누구를 인터뷰하던지 그것을 최고의 것으로 만들라고 늘 강조했다” 며 가베로는 말했다.

1991년, 잉글버트는 두 차례 B.C지역 CBC라디오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라디오 음악국의 총책임자로 일했고 토론토와 벤쿠버를 오가며 벤쿠버 지역을 담당하는 CBC 고위 행정관으로 일했다. 1995년부터 2000년까지 그녀는 라디오 3국과 뉴미디어부서를 담당했다. 그녀의 한결 같은 열정과 새로운 재능은 라디오 3국이 상을 받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CBC 커뮤니케이션 매니저인 캐시 헌트는 1991년부터 2000까지 잉글버트의 보조원이었다. 수잔은 고위 관리자의 허세가 창조적인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발전을 저해한다고 생각했다. 캐시 헌트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예산과 의정서를 수렴하는 과정에서 완충제의 역할을 했고 아래 직원을 잘 지도했다. 주로 사무실에서 청바지와 스웨터를 입고 있는 잉글버트는 인턴사원과 만날 때나 중역 회의실에 있을 때나 동일한 모습이었다.

잉글버트는 문제의 실마리를 신속하게 풀어가는 기술이 있었다. “그녀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난 후 앞으로 다가 앉아 ‘아, 그래요, 앞으로 우리가 그것을 해야겠네요’ 라고 말했다”고 캐시 헌트는 회상했다.

2001년, 잉글버트는 커뮤니케이션과 정보 기술 발전에 도움을 준 사람에게 수여하는 YWCA 여성 특별상을 받았다.

그녀는 2002년 은퇴하고 2005년 7월 빅토리아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춤추는 것을 좋아했고 야구 게임 보는 것을 즐겼다. 잉글버트는 부모의 옛 집을 고치기로 결정하고 건축가를 선정했다. 그러나 집이 완공된 몇 주 후, 그녀는 암 말기로 진단 받았다.

잉글버트의 병은 급속도로 악화되어갔다. 암으로 진단 받고 6주 후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나는 아무 후회가 없습니다. 나는 인생을 즐겁게 보냈습니다.” 비키 가베로는 그녀의 심플하고 명쾌한 성격에 비추어 잉글버트가 자신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할 것이라 상상했다; “그래, 이것은 단지 나의 막이 내린 것 뿐이야”라고.

Susan Englebert
1946년5월 7일 빅토리아 태생
2006년10월 19일 암으로 사망
(향년 60세)
유가족: 남동생 마이클

by 100명 2007. 5. 22. 0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