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6)
정치인이자 니스가아 추장이었던 - 프랭크 콜더
Frank Calder (1915-2006)





▲ 원주민의 권리향상을 위해 공헌한 공로로 프랭크 콜더가 2001년 11월 원주민추장회의 의장으로부터 ‘우리시대의 영웅상’을 수상하고 있다.
작은 키에 높은 이상을 가졌던 프랭크 콜더, 스스로를 ‘작은 추장’이라고 불렀던 그는 니스가아(Nisga’a)족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다. 그는 캐나다뿐 아니라 각 나라가 원주민 토지 반환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정치적으로 변화하도록 도왔다.

프랭크 콜더는 태어나기 전부터 임무를 가진 사람이었다. 1913년, 아더 콜더 (나-쿠아-온, 니스가아의 ‘늑대족’의 추장)와 아내 루이자는 연어 통조림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나스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는 동안 그들의 작은 아들이 카누에서 떨어져 익사했다. 18개월 후, 징고스 마을의 노인이 꿈을 꾸었는데, 루이자의 어린 여동생 에밀리의 아들의 몸에 물에 빠져 죽은 아이의 영혼이 들어가는 꿈이었다. 1915년 아서와 루이자는 전통적인 입양의식을 치루고 에밀리의 셋째 아들을 입양했다. 그가 프랭크 콜더였다.

니스가아족이 토지 반환 문제로 토론을 벌일 때, 대다수의 추장들은 이 싸움은 산을 옮기는 것처럼 쉽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나-쿠아-온은 “비전”을 가진 그의 아들을 선보이며 말했다: “나는 이 아이를 백인이 사는 쿰시완 학교에 보낼 것이다. 또한 백인들이 어떻게 먹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배우게 할 것이다. 이 아이는 다시 돌아와 저 산을 움직일 것이다.”

그는 13년 동안 브리티시 콜롬비아주 칠리왁(Chilliwack) 가까이에 있는 사디스의 성공회 코퀄리짜(Coqualeetza) 학교 기숙사에서 살았다. 학교는 비판의 대상이었고 콜더는 학교의 생존자에게 지급되는 배상금 $8,000을 받았지만, 그의 경험이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그곳에서 법적 싸움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필요한 기술을 배웠고, 원주민 지도자로 성장할 똑똑한 사람들을 만났다.

학교에서 나온 후, 콜더는 칠리왁 고등학교를 거쳐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 신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성공회 신학 대학의 첫 원주민 졸업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성직자로 임명되는 것을 거부하고 정치계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정확하고 똑똑하며 참을성이 많은 그는 1950년 그의 첫 연설에서 원주민 권리를 선언했다. 1927년 연방정부가 독단적으로 맺었던 토지반환 요구안 법령이 1951년에 끝내 폐지되었다. 이 법은 원주민들의 토지반환 요구에 쐐기를 박은 법이었다. 콜더는 "드디어 절망과 암흑의 시간이 끝났다”고 평했다.

그는 연방정부에 원주민 권리를 요구하는 동시에, 니스가아족이 토지 반환 투쟁에 참여하도록 격려했다. 1955년, 그는 니스가아에 토지 반환 요구를 위한 위원회를 다시 만들었다. 그는 나-쿠아-온에게서 칭호 ‘긴 팔 추장’을 받고 니스가아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토마스 버거라는 젊은 백인 변호사가 니스가아를 대표하여 법적으로 싸우도록 한 것이다. 1965년, 버거는 원주민이 주인 없는 땅에서 사냥할 수 있음을 대심원 앞에서 성공적으로 변론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대표해주길 원합니다. 우리는 원주민의 권리를 되찾기 위하여 소송을 제기할 것입니다" 라고 콜더는 말했다. 니스가아는 1967년 9월 소송을 제기했고 1969년 4월 재판을 시작했다. 니스가아는 첫재판에서 패소하자 대법원에 상고했다.

1973년 2월, 법원은 판결을 내렸다. 7명의 재판관 중 6명은 유럽인이 정복하기 전에는 원주민에게 모든 권리가 있었다고 동의했다. 그러나 ‘윌프레드 져슨’을 포함한 세 명의 재판관은 유럽에게 정복당한 후 그들의 권리가 박탈되었다고 주장했고, ‘에멧 홀’을 포함한 세 명의 재판관은 원주민 권리를 계속해서 주장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다. 결국 법원은 원주민 권리회복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고 사건을 기각했다.

비록 상고가 기각되었지만 정치적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피에르 트뤼도(Pierre Elliott Trudeau)와 당시 원주민 담당 장관 장 크레티엥(Jean Chretien)은 재판관 ‘에멧 홀’의 주장(원주민 권리 지지하는)에 영향을 받았다. 보수당과 NDP도 연방 정부가 원주민 요구의 심각성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3년 8월, 크레티엥은 니스가아 조약(2000년에 비로소 비준된 조약) 협의 시작을 공표했다.

1972년, 콜더는 데이빗 바렛의 뒤를 이어 첫 원주민 장관이 될 사람으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콜더는 1973년 7월, 여자와 술 문제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다. 유죄판결은 면했지만, 그는 내각에서 해임되었다. 니스가아 사람들도 지도자의 수치스러운 행동에 실망하여 더 이상 콜더를 원주민 대표로 지지하려 하지 않았다. 콜더는 NDP에서 탈퇴하고 빌 베넷의 소셜 크레딧(Social Credit) 정당 소속으로 입후보했다. NDP 후보자에게 1표차로 지고 그는 정치계를 떠났다. 그 해 그는 60세였다.

정책 사상가였던 콜더는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지는 니스가아 조약 협상에 끈질기게 참여했다. "내가 지도자였다면, 나는 토지 문제와 관련된 이슈에 전념했을 것입니다. 나는 자치 정부가 원주민만의 권리가 아니라 캐나다인 전체의 공민권이라고 생각합니다.” 1975년, 그는 일본인 타마키 코시베와 결혼했고 아들 에릭을 얻었다. 현재 24세인 에릭은 킹스턴의 퀸즈 대학을 졸업했다.

콜더는 로스 베이 묘지의 가족 묘지터를 샀다. 왜 묘지로 나스 강변 니스가아 땅을 선택하지 않고 주 소재지를 선택했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 나의 비석을 보고 ‘저 사람은 누굴까? 무엇을 한 사람일까?’ 묻고 이를 통해 니스가아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Frank Calder
1915년 8월 3일 태생
복부암 합병증으로 11월4일 사망
(향년 91세)
유가족: 아내 타마키, 아들 에릭,
형제 필립 클라크, 도로시 스미스,
버지니아 오버홀트.

* 니스가아(Nisga'a)족 브리티시 콜롬비아 북서쪽 나스강 계곡에 산다.(약 6000명 중 2천5백명이 니스가아 마을에 거주) 가나다(Ganada), 기스카스트(Gisk'aast), 락스기부(Laxgibuu), 락스긱(Laxsgiik) 4부족으로 이루어짐. 토지 반환를 지속적으로 요구, 사냥과 낚시로 경제활동할 뿐 아니라 변호사, 정치가, 교육자, 경영인, 예술인, 기술자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북미에서 가장 풍부한 문화를 가진 부족으로 인식됨.

by 100명 2007. 5. 22. 0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