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5)
캐네디언 전화발명가 그레이엄 벨의 손녀 - 메이블 그로브너
Mabel Grosvenor (1905-2006년)





▲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오른쪽 사진)의 마지막 남은 손녀(앞에 손을 자고 있는 아이)였던 메이블 그로브너 소아과 의사. 온화하고 자상한 성품으로 101세까지 장수했다. 그녀는 의사이기 이전에 할아버지에겐 없어서 안될 유능한 비서였다.
메이블 그로브너는 유명한 전화 발명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의 마지막 손녀였고 최초의 존스 홉킨스 의과 대학 여자 졸업생이었다. 아동기(兒童期) 병으로 사망률이 높았던 1930년대, 그녀는 워싱턴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 쉽게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진취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지만 조카딸과 그들의 자손을 사랑과 관심으로 보살폈다. “그녀는 저에게 어머니 같은 분이며 가족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분이었다”고 조카의 아들 조셉 블레어는 말했다.

블레어는 “그에게 있어서 삶의 주제는 사랑이었습니다. 아주 조용하고 사려 깊고 사랑이 많은 분이며 우리들의 멘토이기도 했습니다. 벧덱(그녀가 태어난 노바스코샤 지역)을 사랑했고 가족 모두를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우리는 그녀의 뒤를 이어 조부모의 소유지이며 캐나다의 중요 유산 중 하나인 베인 브레아(Beinn Bhreagh)를 계속 관리, 유지할 것입니다”

유명한 발명가 벨과 친밀했던 마지막 사람으로서 메이블은 할아버지에 대한 많은 것을 기록한 전기 작가와 저널리스트로 잘 알려져 있다. 1994년 벧덱 저널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벨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할아버지는 키가 6피트였고(그 당시에는 큰 키였다) 날카로운 적갈색 눈과 훤칠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머리카락도 곧았다”.

2003년, 전기작가 샬럿 그레이는 그녀가 머물고 있는 양로원을 방문했다. 98세의 그녀는 거의 앞을 보지 못했으며 보청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부모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행복해 했다. 그녀는 할머니가 귀머거리라는 것을 10살이 되어서야 깨달았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 모두는 말할 때 반드시 할머니 얼굴을 보면서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먼 곳에서 할머니를 부르지 않았다. 이것이 예의 바른 태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노바스코샤 벧덱에서 태어난 그녀는 워싱톤, 듀퐁 서클 근처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부모가 종종 멀리 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름을 캐나다에 있는 조부모와 함께 보내야 했다. 벨은 10명의 손주를 몹시 사랑했다. 전기작가 로버트 V. 브루스씨는 벨은 “모세의 근엄함과 산타클로스의 인자함”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기록했다.

그녀는 ‘탐 셀프릿지’라는 젊은이가 탄 빨간 실크 연, ‘시크넷(아기 백조)’이 50미터를 날고 7분간 아슬아슬하게 공중을 선회한 후 물에 살며시 떨어졌던 그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 있었다. 후에 벨은 이 실험에 대해 글을 남겼다: ‘이 사건을 가장 오래 토록 증언할 사람은 당시 두 살이었던 손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그곳에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몸이 얼듯이 추웠지만 그곳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때 당시 나는 왜 다들 흥분해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수없이 많은 할아버지의 놀라운 실험들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14세의 똑똑한 아이 메이블은 할아버지의 비공식 비서로 유전학, 계보학, 증기선 기계 설계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어린 나이에 접했다. 그녀는 할아버지 벨과 함께 가족 계보를 찾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족보 기록을 찾기 위해 행정사무소와 묘지를 방문했고 그 기회를 통해 존재조차도 알지 못했던 사촌들을 찾아냈다”고 회고했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메이블은 마운트 홀 욕대학에 들어갔다. 1927년 졸업한 후, 그녀는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에 다시 입학했다. 그녀는 7명의 의대 여학생 중 한 명이었다(그 중 한 명은 결핵으로 진단받고 중퇴함). 1931년 졸업 후, 뉴욕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했고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와 불우한 아동을 위한 진료소를 열어 소아과 의사로 일했다.

35년간 의사로 일한 후 일찍 은퇴했다. 은퇴 후, 1960년대 중반부터 그녀는 건강이 좋지 않았던 부모를 돌보았다. 또한 그녀는 가족 소유지의 관리인이 되었다. 그녀는 작은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때때로 은색 컨버터블 차를 몰고 시외로 나가 드라이브를 하기도 하고 정원을 가꾸기를 즐겨했다. 한때 알렉산더 벨 클럽(캐나다에 있는 가장 오래된 여성 클럽)의 명예 회장으로 회의를 관장하기도 했다.

그녀는 워싱턴과 벧덱을 오가며 많은 일들을 했다. 후에 그녀는 울혈성 심부전을 앓게 되어 벧덱에 머물며 치료를 받았다. 증손 조카 블레어는 “그녀는 벧덱의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곳에 머무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Mabel Grosvenor
1905년7월28일 노바스코샤 Baddeck Beinn Bhreagh에서 태어남.
2006년10월30일(월) 사망.
향년 101세.
유가족으로 60명의 조카딸, 조카가 있다.

by 100명 2007. 5. 22. 0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