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4)
진보주의 경제학의 대가 -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John Kenneth Galbraith (1908-2006년)





▲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는 루스벨트와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의 경제자문을 맡았던 진보주의 경제학의 대가다. 하버드대 교수로 말년에는 경제정의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경제학으로 유명한 사람들 중 캐나다가 낳은 세계적인 경제 역사학자 헤롤드 이니스(Harold Innis), 작가로 알려진 경제문학가 스테판 리콕(Stephen Leacock), 그리고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있다.

갤브레이스의 명성은 작가로서 그의 재능과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등 대통령 자문관으로서 그의 영향력, 실용적인 자유 경제학자로서의 그의 업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재치 있고 세련되며 정치, 문학, 외교 등 다방면으로 지식이 풍부했던 그는 1937년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당시 미국에서 두 나라의 시민권을 동시에 갖는 것이 불가능했다). 정치 경제학자 스테판 클락슨(Stephen Clarkson)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인도대사로 부임했던 갈브레이드를 “미국 자본주의를 크게 진보시킨 캐나다인”으로 묘사했다.

그는 ‘미국 자본주의’(1952), ‘풍요한 사회’(1958)등 40권이 넘는 책을 발표했고 30년 동안 하버드 대학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온타리오 남서부 작은 마을 이오나 스테이션(Iona station)에서 스코틀랜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학교 선생이자 농부였던 아버지 윌리엄과 어머니 사라의 셋째 아들이다. 그의 집안은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다. 아버지 윌리엄은 민주당 지지의 정치적 입장을 굳건히 지켰으며 온타리오 농부 연합의 조직원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15세에 어머니를 여읜 그는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먼 길을 다녀야 했기에 지각하기 일쑤였고 학교 성적은 계속 떨어졌다. 1926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아버지의 결정에 의해 온타리오 농업 학교(현 구엘프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충분치 못했던 고등학교 교육 레벨과 건강문제 때문에(‘결핵초기’로 진단 받음) 5년 동안 대학을 다녀야 했다. 그 후 1933년에 미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석사를 1934년에는 농업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의 낙천적인 성격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스파이크(Spike)’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학교의 유명인사가 된 그는 프리랜서로 지역신문에 농업 관련 글들을 기고했다. 성 토마스 타임즈 저널과 스트렛포드 비컨 헤럴드로부터 한 칼럼 당 5달러를 받아 1930년 시카고에서 열린 ‘국제 가축 전시회’에 갈 자금을 벌었다. 그는 그 당시를 “대학생활에서 최고로 행복했던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1929년 발발한 대공황은 그를 농업경제학자에서 정부 개입주의자로 바꾼 운명적 계기가 됐다. 1937년 그는 대공황 대처론을 제시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수요 이론’을 학습하기 위해 시카고대에 특별연구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34년부터 39년까지 하버드 대학에서 5년간 계약직 교수로 지냈고 39년부터 42년까지는 프린스턴대 교수로 제자를 키웠다. 미국 농업국에서 일하기 위해서 시카고로 거처를 옮긴 그는 1941년 전쟁 시 일어나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미국 시세를 조절하고 군 조달품 생산을 장려하는 시세 담당 행정 보좌관이 되었다.

갤브레이스는 1960년 인도대사로 부임했다가 3년 뒤에 다시 하버드대에 복귀하여 1975년 은퇴할 때까지 제자를 양성했다. 1956년 가난에 시달리는 인도를 방문하던 중에 그는 광고의 현혹이 소비자들의 욕구를 과도하게 자극해 불필요한 상품을 소비하게 한다고 지적하면서 과점(寡占) 기업들의 폐해를 비판했다.

존 F 케네디의 경제 자문관으로 일했던 그는 린든 존슨 대통령 재임시에 가난과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을 입안하는 등 신뢰가 두터웠으나 베트남 전쟁에 대한 견해가 상반되면서 결별했다.

은퇴 후에도 계속해서 주류 경제학을 비판했고 미국 경제의 치부와 모순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냈다. 1996년 저서 ‘좋은 사회’에서 사회전반은 정치적으로 가난한 자를 돕는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95세 되던 2004년 그는 관료주의 기업이 소비자와 정부를 기만한다고 비판한 에세이 ‘결백한 사기의 경제학’을 발표했다.

John Kenneth Galbraith
1908년 10월 15일 온타리오 아이오나 스테이션 태생
2006년 4월 29일 97세 일기로 케임브리지에서 사망
유가족; 부인 Kitty, 세 아들 John Alan, Peter, and James, 여동생 캐서린(토론토)

by 100명 2007. 5. 22. 0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