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3)
철학적이고 영적인 사업가 IGA 회장 - 버트람 로브
Bertram Leob (1916-2006년)





▲ 창고에서의 버트람 로브. 로브는 오타와 여러 단체들에게는 수백만 달러를 주는 업체로 인식됐다.
버트람 로브의 아버지는 아들이 랍비(유태인 사제)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군인매점의 매니저로 복무하면서 그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를 더 크게 확장할 계획을 가졌다.

IGA(International Grocery Association) 체인의 대표였던 로브는 시장의 움직임에 강제로 맞추기 보다는 철학적인 사고를 따라 사업을 확장해갔다. 때로는 경제적인 요인을 무시해서 결국 그의 야망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큰 비전을 가진 사람이었다.

1966년 M. Loeb는 어려서부터 “가문의 이름이 영원히 보존되도록 해야 한다. 돈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지 목적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고 아버지에게 늘 이야기를 들었다.

오타와 출신의 버트람 로브는 러시안계 유대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 모세 로브는 스탈린 독재정권의 군인으로 징집되는 것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러시아의 겨울을 그리워하다가 오타와로 이사하게 됐고 그곳에서 사탕과 담배를 파는 가게를 운영했다. 가게는 오타와 기차역과 가까이 있어 정차시간에만 장사가 잘 되었다.

어린 버트람은 허드렛일을 하며 부모를 도왔다. 버트람은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마늘에 시럽을 바르고 ‘초코렛 묻힌 아몬드’라고 속여 친구에게 먹이곤 했다고 한다. 그는 4년간 뉴욕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을 그리고 뉴욕의 유대 신학교에서 종교학을 공부했다. 그 후, 그는 히브리어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1940년 그는 캐나다군에 입대, 페타와와에서 하사관으로 복역했다. 1945년 오타와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랍비가 되려 했던 계획을 포기하고 아버지가 경영하던 사업을 도왔다. 그 사업은 도매업체 M. Loeb Ltd.로 성장했다. 그의 딸은 “여러 면에서 아버지는 비즈니스의 세계에 걸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업에 관심은 많았지만 제대로 비즈니스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다” 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소규모 가게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버트람은 패밀리 비즈니스를 국제적인 업체로 성장시킬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모세가 사망한 1951년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빠르게 성장하는 새로운 체인스토어에 맞서 싸우는 개인 식료품점 협회(IGA)를 둘러보았다. IGA의 컨셉을 캐나다로 적용시켜 오타와 식료품점을 하나 둘씩 설득하기 시작했다. 캐나다 IGA 프렌차이즈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1952년 말, 체인은 34개 스토어를 포함했고 이들의 판매수입은 350만 달러에 달했다. 그는 인센티브 시스템을 적용하여 고객이 매번 10센트 이상으로 구입하면 도장을 찍어줘 다양한 제품으로 바꿀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매우 흥미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일을 자기 방식대로 해나갔어요”.

1950년대, 많은 돈을 유대인 자선단체에 보낸 후,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 데이비드 벤 구리온의 초대를 받아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벤 구리온 수상은 “이스라엘은 로브씨와 같은 사업가를 필요로 한다. 국내에서 슈퍼마켓 체인을 운영해 달라”고 제안했다. 그는 1958년 ‘슈퍼솔’이라는 이름의 이스라엘 첫 체인 스토어를 열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통 유대교의 반대에 부딪혔다. 종교적인 규율을 어기지 않고 어떻게 같은 카트 안에 유제품과 소고기를 함께 넣을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쇼핑 카트 안에 유제품을 놓고 고기는 카트 위의 바구니 안에 넣으면 된다는 것이다.

IGA 캐나다는 지속적으로 성장해갔다. 1962년 1억4천만 달러의 매상고를 기록했고 체인은 항공기와 컴퓨터를 구입할 만큼 규모가 커졌다. 그러나 1964년부터 어려움이 시작됐다, 체인의 매니저가 130만 달러를 횡령했고, 찰스 브론프만이 회장인 이사회는 로브를 사장 자리에서 해임했다.

그 후 1965년, 그는 45만 달러를 오타와 시립 병원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당시 시장이었던 샬롯 위턴은 기부금을 거절했다. 그녀는 반 유대인파로 알려져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돈을 칼튼 대학의 사회학부 건물을 짓는데 사용하도록 제공했다. 수십 년이 지나고 그는 오타와 시립병원의 연구센터 설립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수익금을 사회에 다시 환원해서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비즈니스와는 양립할 수 없는 철학적이고 영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굉장히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멋진 계획서 보다는 단지 ‘비전, 추진력, 그리고 목표’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고 랍비 불카는 회상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혔다. 당시 M. Loeb 주식회사의 판매는 10억 달러를 넘어섰고 그는 시카고 IGA 프렌차이즈를 매매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돌발적인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Loblaws와 Provigo와 같은 경쟁업체가 지분을 매입, IGA를 인수할 수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형제들은 이미 그들 주식의 대부분을 팔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15%를 넘지 않았다. 미국 경제는 주가를 떨어뜨렸고 1977년 이사회는 그를 회장에서 몰아냈다.

그는 정치권에 잠시 발을 들여놓기도 했다. 1979년 연방선거에서 오타와 자유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권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다시 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1980년 초, 주유소 Sunys Petroleum에 투자할 것을 권유 받아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사업은 빠르게 성장하여 온타리오와 퀘벡에 250여곳이 넘는 주유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는 저만치 물러나서 지켜만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로브씨는 1996년 80세가 되어 은퇴할 때까지 성공적으로 사업을 경영했고 동시에 사회에 지속적으로 기부했다. 가장 최근 그는 오타와 대학 버트람 로브 신체 조직 연구소에 백만 불을 기증했다.

Bertram Leob
1916년 2월6일 오타와에서 출생
2006년 9월11일 오타와에서
골수암으로 사망. 90세.
유가족 2명의 자녀 (나오미, 다이아나), 손자(사무엘),
형제(율, 데이비드)

by 100명 2007. 5. 22. 0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