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105>인도 룸비니·쿠시나가르 | ||
'天上天下 唯我獨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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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는 인류 역사에서 특별한 시기였다. 페르시아 지방에서는 조로아스터가 나타나 세상은 선신과 악신의 투쟁터이며 최후 심판의 날이 온다는 사상을 전파해 후일 유대교와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공자가, 인도에서는 부처가 탄생했다.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인이 되는 진리를 가르쳐 준 부처의 탄생지 룸비니는 현재 네팔에 속해 있다. 인도의 북쪽 도시 고라크푸르를 지나 국경도시 소나울리에 도착하면 나무 막대기에 커다란 돌을 매달아 놓은 국경 같지 않은 국경의 풍경을 보게 된다. 여기서 출입국 절차를 밟은 뒤 네팔로 넘어가 벌판을 20여㎞ 달리면 허물어진 불교 사원 터와 물이 고인 연못이 있는 룸비니가 나온다. 이곳이 부처 탄생지라는 증거는 바로 근처에 있는 아쇼카 석주다. 기원전 3세기, 불교를 크게 부흥시켰던 아쇼카 대왕은 불교 성지 곳곳에 석주를 세웠는데, 룸비니의 아쇼카 석주에 새겨진 글에는 “아쇼카 대왕은 이곳을 친히 참배했고 석주를 세웠으며, 룸비니 마을은 일반 세금을 면제해 주고 생산세도 8분의 1만 내게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이곳의 현재 모습은 5세기에 룸비니를 방문한 중국의 법현 스님이나 7세기에 방문한 현장 스님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룸비니는 부처의 탄생지이나 오랫동안 폐허가 되어 밀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요즘 들어서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많은 불교 순례자들은 허허벌판의 허물어진 불교 사원과 쓸쓸한 풍경을 보며 잠시 실망감에 젖기도 한다.
이 사원의 벽을 자세히 보면 마야 부인은 보리수 가지를 잡고, 방금 태어난 싯다르타는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부조를 찾을 수 있다. 샤카족이 세운 카필라 왕국의 왕비 마야 부인은 관습에 따라 해산하기 위해 친정집으로 향하다, 룸비니의 연못에서 목욕한 후 갑자기 산기를 느껴 아기를 낳게 된다. 부처의 탄생 설화에 따르면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아기 싯다르타는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 걷고 오른손은 하늘,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하늘과 땅에서 오로지 나만이 존귀하다)”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마야 부인은 싯다르타를 낳은 후 이레 만에 세상을 떴고, 어린 나이에 생로병사의 고뇌에 눈을 뜬 왕자는 결국 스물아홉 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왕궁을 떠나 출가한다. 왕자는 떠나고 카필라 왕국은 쇠퇴했으며, 부처 생전에 코살라 왕국의 침입을 받아 파괴된다. 샤카족은 멸망했고 부처의 일가 친척들은 다 불법에 귀의하여 대가 끊긴다. 이렇듯이 부처의 흔적은 육체로 이어지지도 않았고, 그 탄생지도 썰렁하기만 하다. 그러나 텅 빈 공간이기에 오히려 약 2600년 전의 풍경이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평생 가르침을 펴던 부처는 여든 살의 나이에 북쪽으로 길을 가다가 ‘춘다’의 집에서 받은 공양 때문에 병이 난다. 대장장이 아들 춘다가 올린 음식 중에 ‘수카라맛다바’라는 음식이 문제였다. 이 음식 재료가 야생 돼지고기라는 말도 있고, 버섯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부처는 독성이 있고 상한 것으로 보이는 그 음식을 맛본 후 춘다에게 “이 음식을 나만 먹게 하고 남들에게는 주지 말며, 남은 것은 구덩이에 파묻으라”고 말한다. 부처는 이 음식 때문에 피가 섞인 설사를 하면서도 계속 길을 가다가 마침내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들게 된다. 경전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 병들 것을 알면서도 춘다의 공양 음식을 먹었고, ‘열반에 들게 한 최후의 공양을 바친 공덕’을 얘기하며 오히려 괴로워하는 춘다를 위로했다고 한다.
쿠시나가르는 불교 경전에 매우 조그만 마을로 묘사되어 있지만, 현재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제법 활기가 도는 소도시다. 이곳에는 열반 사원이 있고, 그 안에는 거대한 불교 열반상이 있다.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댄 채, 두발을 포개어 누워 있는 이 열반상은 기록에 따르면 원래 사원 안에 모셔져 있던 것인데, 약 1.5㎞ 떨어진 강바닥에서 근래에 발굴되었다. 심하게 파손된 이 불상을 미얀마 불교도들이 수리하고 도금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고 한다. 부처는 열반에 들기 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편다.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이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모든 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열반에 든 부처는 화장되었는데 쿠시나가르에는 부처를 화장한 곳에 만든 거대한 스투파, 즉 다비탑이 있다. 부처의 유해에서 나온 수많은 사리와 함께 불법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부처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해탈의 기쁨을 누렸으나, 그 기쁨에 안주하지 않고 평생 길에서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펴다가 길에서 육신의 탈을 벗었다. 부처의 탄생지 룸비니와 열반지 쿠시나가르는 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 가르침을 편 사르나스와 함께 불교 4대 성지로 수많은 불교도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 여행 에피소드 룸비니의 불교 사원 터에서 네팔 소년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몽골리언 계통으로 한국인과 비슷한 얼굴을 가진 그들은 부처는 인도인이 아니라 자기들과 얼굴이 비슷한 몽골리언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 같은 얘기는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이겠지만, 룸비니 마을에 사는 그들을 보며 약 2600년 전의 샤카족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부처의 가르침대로 육신이 뭐 그리 중요하며, 진리 앞에서 어떤 종족인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날 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요란한 풀벌레 소리를 듣고 있자니 먼 옛날 마야 부인이 이 근방에서 목욕한 후 아기 싯다르타를 낳은 게 바로 엊그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여행정보 고라크푸르에서 쿠시나가르까지는 거리가 150㎞로, 버스가 다닌다. 룸비니까지는 고라크푸르에서 버스로 국경도시 소나울리까지 간 뒤 네팔로 들어가 삼륜 오토릭샤를 타는 것이 편리하다. 고라크푸르에서 소나울리까지는 약 90㎞, 소나울리에서 룸비니까지는 약 22㎞다. 인도 대도시에서 고라크푸르까지 가는 기차는 많다. |
2007.05.17 (목) 1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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