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22) - Sony(하)
기술에 대한 맹신이 '베타맥스' 실패 불러


고자세 버리고 동종업계와 제휴, 상생모색



▲ (왼쪽)오디오 시장을 석권한 자기(磁氣)테이프를 사용한 녹음기.(오른쪽) 비디오 카세트 녹화 및 재생장치인 베타멕스는 선명한 화질에서 파나소닉의 VHS를 앞섰지만 소비자들로부터 외면 당해 실패하고 말았다.
소니는 20년 전 커다란 성공을 안겨준 자기 녹음 테이프를 떠올리며, 이 기술을 움터오는 TV시장에 상업적으로 적용할 방법을 탐색해 나갔다. 그리하여 1969년에 최초의 비디오 카세트 녹음 및 재생 장치를 출시했다. 1971년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 오른 아키오 모리타는 다음해에 ‘베타맥스’를 생산하는 자회사를 차려서 이를 전 세계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베타맥스는 1975년에 시장을 강타했고, 수년 전 트리니트론과 마찬가지로 기기 애호가들의 뜨거운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TV도 그랬지만, 이 VCR 플레이어도 가격이 매우 비쌌다. 최초의 모델들은 자그마치 2,000달러나 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자동차 가격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가격 장벽 때문에 제품은 널리 퍼지지 못했고, 그러는 동안 경쟁사들은 저렴한 대체 제품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파나소닉 이라는 회사가 2년 후에 VHS라는, 약간 다른 방식을 활용하는 비슷한 제품을 내놓았다. 전쟁이 불붙으면서 가격은 곤두박질을 쳤다. 화질에서는 소니 제품이 더 좋은 평을 얻었지만, 파나소닉 제품이 더 긴 테이프들을 재생할 수 있었고, 헐리우드 영화도 VHS 방식으로 출시되는 것이 훨씬 더 많았다. 소비자들은 더 많은 선택권을 제공하는 쪽으로 돌아섰고, 소니는 결국 베타맥스의 생산을 중단해야 했다. 1976년 이사회 회장이 된 아키오는 이제는 VHS 방식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한 동안 잘 받아들이지 못했고, 이 때문에 소니는 자신들이 문을 연 시장에서 입은 손실을 완전히 만회하지 못했다.

아키오는 베타맥스의 참패 이후 단독으로 새로운 시장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그래서 차후의 제품은 경쟁에 앞서 먼저 업계의 표준을 설정할 수 있도록 다른 전자 회사들과 제휴를 맺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정신만은 변함이 없었다. 1980년 무렵에 그는 헤드폰으로 들을 수 있는 소형 라디오 수신기 출시에 박차를 가했다. 회사 내부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제품에 무슨 큰 수요가 있을까 하고 걱정했지만, 그 결과 태어난 워크맨은 소니의 최다 판매 제품 가운데 하나이자,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소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제품이 되었다.

▲ 금년 8월에 출시될 소니 마일로는 인터넷 전화, 인터넷 웹브라우저, 멀티미디어 기능이 내장되어 있다.
워크맨이 라디오에서 오디오 카세트 플레이어를 거쳐 CD플레이어로 이어지며 크나큰 성공을 거두자, 더 넓은 영역으로 뻗어 나가려는 소니의 야망은 한층 부풀었다. 1987년에 이들은 세계 최대의 음반 회사인 CBS 레코즈 그룹을 34억 달러에 인수했다. 2년 후에는 컬럼비아 픽처스 엔터테인먼트를 40억 달러에 매입해서 영화 산업에도 들어섰다. 그 밖에도 문화 산업 분야의 여러 대기업들이 대열에 합류했고, 몇 개의 보험 회사와 금융 회사도 소니의 가족이 되었다. 그에 따라 아키오가 국제 경제계에서 차지하는 지위도 높아져만 갔다. 1994년 건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날 때까지 그는 회사 경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아키오가 물러난 바로 그 해에 소니 역시 사상 최대 히트 상품으로 꼽히는 플레이 스테이션 컴퓨터 게임기 가 출시되었다.

워크맨과 마찬가지로 플레이 스테이션도 처음에는 회사 내에서 그렇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기 못했다. 사람들은 닌텐도가 이미 게임 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며, 소니가 그때까지 업계 표준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그다지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들에도 불구하고, 1984년부터 이 기계를 연구하던 수석 엔지니어 구타라기 겐은 포기하지 않고 개발을 계속해나갔다. 그런 뒤 나타난 결과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플레이 스테이션의 찬연한 성공은 연간 70억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소니 전 세계 매출의 7퍼센트와 총 이익의 27퍼센트를 차지했다.

하지만 플레이 스테이션의 성공 하나가 소니의 다른 문제들을 저절로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물론 소니는 아직도 같은 일본 기업인 마츠시타에 이어 세계 2위 자리를 고수하는 굴지의 소비자 가전 업체이다. 하지만 영화와 음반 사업은 2000년에 나온 영화 <나는 아프리카를 꿈꾸었다 (I Dreamed of Africa)>같은 거액의 실패작들이 줄을 이으면서 붉은 잉크를 쏟아내고 있다. 또한 새롭게 출시된 플레이 스테이션 2는 일본 출시 사흘 만에 98만 대가 팔리며 뜨거운 반응을 얻었지만,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회사에 적잖은 타격을 입혔다. 더욱이 시장에 새로이 떠오르는 경쟁자들은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렇지만 현 회장 겸 CEO인 이데이 노부유키는 창업자들의 정신을 잃지 않고 새로운 분야에 대한 탐색을 계속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100달러 미만의 가격으로 출시된 PDA도 있는데, 이 제품은 소니의 다른 제품들과도 연계해서 활용할 수 있다. 이들은 고성능 휴대폰과 휴대용을 컴퓨터도 개발하고 있으며, 워크맨에서 플레이 스테이션까지 자신들이 만드는 모든 제품을 웹과 연결시킬 방법도 강구하고 있다. 1999년에 사망한 아키오 모리타가 후손들의 이러한 활동을 본다면 틀림없이 흥미로워 할 것이다.

by 100명 2007. 5. 15. 1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