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극장은 꿈을 꾸게 하는 곳" | 2007-05-08 13:18 |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편지 띄웁니다. 어제 하루종일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조금 늦은 오후 취재를 위해 회사를 나서니 눈이 확 떠지는 것 같았습니다. 눈부신 햇살과 푸른 하늘, 초록빛 나뭇잎들, 봄의 절정 5월입니다. 행복한 봄날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오페라 '리날도'와 연출가 피치 얘깁니다. 지난주에 정리했어야 할 이야기를 이제서야 하게 되네요. 피치의 인터뷰는 좀 더 자세히 제 블로그(http://ublog.sbs.co.kr/shkim0423)에 올릴 예정입니다. --------------------------- ![]() 올해 77살, 이탈리아의 오페라 연출 거장 피에르 루이지 피치가 12일 예술의 전당에서 개막하는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를 시작으로 한국에서 자신의 연출작을 3년 동안 공연하게 된다. 5월 1일 근로자의 날, 피치의 기자간담회에 다녀왔다. 사실상 휴일인데도 기자간담회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기자들로 북적거려 큰 관심을 입증했다. 피치는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 개관 기념 공연으로 정명훈 지휘로 올려졌던 베를리오즈 '트로이 사람들' 연출을 맡았던 연출가다. 1951년 무대 감독으로 처음 공연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지금까지 이탈리아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과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 등 유럽의 명문 극장에서 오페라 연출가로 활약하고 있다. 건축학을 공부했던 그는 오페라 연출 뿐 아니라 직접 무대와 의상까지 디자인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번 '리날도'에서도 그는 무대와 의상을 직접 디자인했다. 거장 피치가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공연을 올린다는 소식은 국내 음악 공연계에서는 큰 뉴스다. 피치를 초청한 단체는 민간 오페라단인 한국 오페라단. 한국 오페라단이 피치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도 재미있다. 한국 오페라단 박기현 단장은 지난해 이탈리아에 출장을 갔다가 밀라노의 한 호텔에서 우연히 마주친 피치의 얼굴을 알아보고 쫓아가서 마침 가지고 있었던 피치 연출작 오페라 DVD 여러 장을 꺼내들고 사인을 요청했다고 한다. 피치는 생전 처음 보는 동양인 여성이 자신을 알아본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한국에서 오페라단을 운영한다는 얘기를 듣고 박단장 일행을 베네치아 자택으로 초대했다. 피치는 이후 박단장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예술의 전당 등 공연장을 둘러보고, 클래식 음악 동호회인 무지크바움에서 한국의 오페라 팬들과 만남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정기적으로 자신의 연출작을 올리기로, 한국오페라단과 합의했다.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된 인연이 한국에서 3년간 열리는 '피치 페스티벌'로 이어지게 된 셈이다. 박 단장은 '그전에 매니지먼트 사를 통해 피치 선생님을 만나려고 해도 너무 유명하고 바쁘고 개런티가 높은 분이어서, 만나지도 못했다'며 우연한 만남의 결실을 뿌듯해했다. ![]() 피치가 한국에 처음 선보이는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는 십자군의 용맹한 장군 리날도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에서 해방시키고 잡혀간 연인 알미레나를 구해내 결혼한다는 이야기다. 이 오페라의 '울게 하소서'라는 아리아는 한국에서도 꽤 유명하다. 영화 '파리넬리'의 주인공이 카리스마를 발산하며 오페라 무대 위에서 부르는 바로 그 노래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인 카스트라토(거세가수)가 부르지만, 원래는 리날도의 연인 알미레나 역을 맡은 소프라노가 부르는 노래다. 그러나 '리날도' 오페라 전곡이 우리나라에서 공연된 적은 없다. 우리가 국내에서 접하는 오페라 레퍼토리는 베르디나 푸치니 같은 비교적 친숙한 작곡가들의 작품들(라보엠, 토스카, 라트라비아타, 나비 부인 등등) 몇 편에 한정돼 있다. '리날도' 뿐 아니라 바로크 오페라 자체가 국내에서는 아주 생소한 장르다. 피치는 관객들이 항상 보던 작품만 봐야 한다는 법은 없다며 낯선 바로크 오페라를 첫 공연작으로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공연이 사람들을 꿈꾸게 만들어줘야 한다'며, 바로크 오페라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꿈을 꾸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라고 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사람들이 모노톤의 현실에서 벗어나 꿈을 꾸도록 하고, 좀 더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오페라가 필요한데, 바로크 오페라가 바로 그런 것이란다. '리날도'에는 영웅이 있고, 영웅의 연인이 있고, 마법을 쓰는 마녀가 나오고, 인어도 등장한다. 피치가 연출한 '리날도'에서 등장인물들은 제 발로 걸어서 움직이지 않는다. 이들은 마치 그리스. 로마의 조각상처럼, 보조 출연자들이 움직이는 받침대 위에 올라 노래한다. 이들이 걸친 길고 펄럭이는 넓은 망토(보조 출연자들이 이 망토를 뒤에서 잡고 흔들어 아름다운 주름을 만들어낸다) 역시 시각적으로 화려한 느낌과 함께, 출연자들에게 비현실적이고 신화적인 위용을 부여한다. 전투 장면에서도 주인공들은 직접적으로 상대방과 부딪히지 않는다. 이들은 말을 타고 나타나(받침대에 실려 스르르르~) 망토를 펄럭거리며 칼을 뽑아든다. 눈에 잘 띄지 않게 검은 옷을 입고 나오는 보조 출연자들은 이 동안에도 열심히 받침대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인물의 움직임을 표현해야 한다. 보조 출연자들은 비록 극의 진행에 직접 관여하는 '캐릭터'를 갖고 있진 않지만, 등장인물의 동선을 결정하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피치는 주역을 맡은 이탈리아 성악가들이 입국하기 전부터 한국에서 뽑은 20여 명의 보조 출연자들의 연습을 감독했다고 한다. 피치는 '리날도'를 '이미지 중심이며 대단히 시각적인 공연'이라고 표현했다. 무대와 의상, 조명은 화려하고 강렬하다. 독특한 점은 각 캐릭터에 맞는 색깔들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리날도'가 속해 있는 십자군의 인물들이 등장할 때는 푸른빛이, 마녀와 이교도들이 등장할 때는 붉은 빛이 무대를 지배한다. (얼마 전 공연됐던 프랑스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도 캐퓰릿 가문과 몬태규 가문을 각각 붉은 빛과 푸른 빛 의상과 조명으로 표현했었다.) 나는 DVD 타이틀로 '리날도'를 접했지만, 공연장에서 직접 보는 느낌은 아마 또 다를 것이다. 피치는 'DVD는 카메라가 선택한 장면만을 보여준다'며, '리날도'의 진면목을 보려면 반드시 오페라 극장으로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날 피치는 자신이 기자들을 초청한 것이라며, 간담회의 식사 비용을 모두 자비로 부담했다고 한다. 피치의 초대로 참석했던 기자간담회는 휴일 근무를 자청한 보람이 있을 만큼, 충분히 즐거웠다. 이제 피치는 관객들을 극장으로 초대하려 한다. "상상력을 자극하고, 꿈을 꾸게 해 주는, 극장으로 오세요." |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