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스텐더드 오일 + 록펠러 = 정유업계의 골리앗?
19세에 사업확장욕망. '시추'보다 '정유'에 눈독
창업자: 존 D.록펠러, 새무얼 앤드루스, 헨리 M. 플래글러
특징: 연방 대법원의 명령을 받고 분리되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정유 업체였음
주요 제품: 등유, 연료, 윤활유, 기타 석유 부산물
창업자 겸 사장: 존 D. 록펠러
창업 지역: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
해체 전의 시장 가치: 1억 달러
주요 경쟁사: 없었음
활동 연도: 1870~1911
![](http://www.koreatimes.net/weekly/photo/bigco_pic/cop07041302.gif)
물론 록펠러가 이 탐욕스런 거인을 혼자 힘으로 운영한 것은 아니다. 록펠러 같은 경영의 귀재라도 한때 미국 내 석유 생산과 가공, 마케팅과 수송의 거의 전 영역을 움켜쥐고 흔든 이 정유 업계의 ‘문어’를 다루는 데는 비범한 경영 팀이 필요했다. 하지만 J.D.-록펠러의 별칭-는 이 모든 것을 통괄하고 움직여나가는 힘이었다. 그와 그의 회사가 연방 반독점법에 연루되어 결국 문을 닫게 되기 전까지는.
록펠러는 당대의 기민한 비즈니스맨의 수준을 벗어난 인물이었다. 그가 아흔일곱 살로 죽었을 때 그가 보유했던 토지의 가치는 10억 달러에 이르렀는데, 요즘으로 치면 그 열 배쯤 되는 액수일 것이다. 그는 평생에 걸친 자선 활동으로 수중에 남은 것이 거의 없을때까지 돈을 풀고 또 풀었다. 스탠더드 석유를 창업한 해에는 클리브랜드 유클리드 거리 침례교회를 짓는 데 2만 달러를 기부했다. 그 뒤 70년 동안 그는 록펠러 재단과 록펠러 의학 연구소 등 수많은 자선 단체에 재정 지원을 했으며, 시카고 대학을 세우는 데 자금을 대고, 그밖에도 수많은 대학과 교회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부를 했다. 일생 동안 그가 자선 사업에 쏟아부은 돈은 5억 달러로 추산된다. 그렇지만 그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정유업으로 입신한 악명 높은 거부 정도로 여겨질 뿐이다. 그런데 그의 도드라진 인생의 기록 자료들을 살펴보면, 그는 이런 모순에 별로 구애받지 않았던 듯하다.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1839년 뉴욕 주 북부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신앙심 깊은 어머니가 집에서 네 명의 자식을 성심껏 기르는 동안, 아버지는 마을에 나가 갖가지 사기 행각과 돌팔이 의료 처방으로 지역 사람들을 갈취했다. J.D.가 열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가정부를 강간한 혐의로 고소되었고, 가족은 도망쳤다. 그러다가 정착한 곳이 클리브랜드 였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가족을 팽개치고 혼자 사우스 다코타로 달아났다. J.D. 는 1855년에 휴잇&터틀 잡화 상점에서 회계 보조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급으로 받는 3.5달러 가운데 일부를 꼬박꼬박 교회에 헌금하면서도 3년 만에 800달러를 모았다. 그 돈에다 빌린 돈 약간을 더 보태서 그는 영국 출신 이주민 모리스 B. 클라크와 함께 잡화 상점을 차렸다. 건초, 양곡, 정육 등을 판매한 그의 가게는 늘 성시를 이루었다.
이 때 록펠러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지만 강렬한 사업 확장의 욕망을 품고 있었다. 그때는 10년 전 펜실베이니아 주의 앨러게니 산맥에서 수익성 높은 유정이 개발된 이후 석유업이 붐을 이루던 때였다. 클러크의 친구 한 명이 석유 업계에 종사했는데, 1863년 이 친구가 자금을 구하러 두 사람을 찾아왔다. 록펠러는 그에게 4,000달러를 투자하고 마침내 그의 금맥이 된 영역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석유를 탐사하고 유정을 굴착하는 것은 언제나 기복이 심한 사업이다. 그 당시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석유 가격은 배럴당 10센트에서 20달러 사이를 널뛰듯 오르락내리락했다. 록펠러가 이 무대에 뛰어 들었을 때, 석유 가격은 5달러를 중심으로 유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을 끈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영민한 록펠러는 훌륭한 유정이 발견되면, 각종 석유 부산물을 생산하고 판매할 정유업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유정 개발보다는 정유업이 훨씬 더 돈벌이가 된다는 것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클라크 외에 새무얼 앤드루스라는 또 다른 동업자를 영입해서 1863년 오하이오 주에 작은 정유 회사를 차리고, ‘엑셀시어 오일 워크스’ 라고 이름 붙였다.
이 신생 회사는 원대한 성장을 꿈꾸며 기존 정유 업체들을 하나 둘 사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리브랜드 시의 50개의 업체와 피츠버그 시의 80개 업체가 이들에게 넘어왔다. 그는 공정의 전 과정을 직접 관할하면 이익이 더 커지리라는 판단 아래 창고와 입목지도 사들였으며-석유통을 직접 만들기 위해서-, 심지어는 제품 수송을 위해서 선단까지 샀다. 1865년에 록펠러는 클라크의 지분을 모두 매입해버리고, 그 2년 후에 지역 사업가인 헨리 플래글러를 영입했다. 플래글러는 돈도 있었지만, 떠오르는 새로운 운송 수단인 철도 사업-석유 수송 수단으로 배보다 훨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회사 이름을 ‘록펠러, 앤드루스&플래글러’로 바꾸었다가 3년 후 다시 스탠더드 석유 회사로 바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최대의 정유 업체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국내외에 모두 경쟁사들이 있었다. 스웨덴의 ‘노벨 브라더스’, 영국의 ‘셸 트랜스포트&트레이딩’ 같은 회사들이 맹활약을 펼쳤기 때문에, 1880년대만 해도 미국의 생산량은 전 세계 생산량의 절반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스탠더드 사는 이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최고 수준의 화학자, 마케팅 전문가, 법률가들을 고용했다.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