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서남부의 케랄라 지방은 넉넉한 잎을 드리운 코코넛 나무와 드넓은 호수들이 많아 풍광이 아름답다. 주민들 교육 수준도 높고 공산당원들과 기독교인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힌두교 사원에서 절을 하는 공산당원들을 과연 공산당원으로 볼 것인가’와 ‘교회에 다녀온 뒤 자기 집에 모셔 놓은 힌두교 신상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하는 사람을 과연 기독교인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 케랄라 지역은 먼 과거부터 서양과의 접촉이 잦았는데, 에르나쿨람(Ernakulam)과 코치(Kochi)에 가면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에르나쿨람은 신도시이고, 바로 코앞에 있는 섬의 구도시가 코치다. 정식 명칭과는 달리 주민들은 코친(Cochin)이라고도 부르는데, 역사적인 흔적은 거의 모두 구도시에 남아 있다.
1498년 포르투갈의 장교 바스코다가마는 대포로 무장한 120t급의 배 네 척을 거느리고 희망봉을 돌아 10개월 만에 인도 서남부 해안의 칼리쿠트(Calicut) 항구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은 향신료와 기독교인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기독교인은 동방의 어느 곳에서 기독교를 믿고 있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왕과 백성을 의미했다.
당시 이슬람 세력의 침입을 받은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동방의 기독교인들과 힘을 합쳐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싶어했다. 그가 생각한 프레스터 존 왕은 인도에 없었으나, 바스코다가마는 코치항을 거쳐 향신료를 잔뜩 싣고 포르투갈로 갔으며, 그 후부터 유럽인들의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칼리쿠트와 코치는 이미 아랍인과 중국 상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국제무역항으로 중국인들의 흔적도 남아 있다. 중국인이 전파한 ‘중국식 낚시 그물(Chinese Fishing Net)’이라는 것인데, 매우 큰 그물을 나무에 매달아 바다에 담가 놓았다가 수시로 들어올려 고기를 낚는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코치에는 1503년 포르투갈인들이 지은 성당도 있지만, 여행자들의 눈길을 잡아 끄는 것은 유대교 회당인 시나고그로. 회당 안에는 유대인들과 인도인들의 교역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그곳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992년부터 기원전 952년경 사이, 즉 솔로몬 왕 때부터 유대인들이 이곳에 와서 상아, 향신료, 공작새 등을 거래했다고 한다. 그러던 유대인들이 이곳에 처음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72년경이며, 379년에는 일시적으로 유대 왕국을 세운 적도 있다고 한다. 이 유대인 회당이 세워진 것은 1524년인데, 이 마을에는 아직도 유대인들이 살고 있으며 사원에 들어가면 그들의 흔적을 물씬 느낄 수 있다.
이곳에는 초대 기독교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인도의 기독교인들 중에는 예수의 제자인 도마가 인도에 와서 전도했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예수의 부활 후 직접 상처를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던 ‘의심 많은 도마’는 인도까지 와서 전도를 했고, 에르나쿨람에서 동북쪽으로 약 40㎞ 떨어진 말라야투르(Malayattoor)에는 그를 위한 교회도 있다. 도마는 그 후 전도를 하다가 남동쪽의 첸나이(예전의 마드라스)에서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코치에서는 독특한 민속 무용극인 카타칼리도 볼 수 있다. 카타란 이야기, 칼리는 연극이란 뜻인데, 주로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를 소재로 공연을 한다. 공연장에 미리 가면 그들이 분장하는 과정을 볼 수가 있는데, 배우는 모두 남자들이다.
얼굴에 온갖 색깔을 칠하고 눈을 크게 분장하며 커다란 금색 방울 귀걸이, 금팔찌 등을 걸친 채 엉덩이 부분이 크게 부푼 치마를 입는다. 이렇게 모든 것을 크게 형상화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힘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카타칼리에서 무용수는 눈, 눈썹, 입, 목, 손, 팔, 다리, 발목 등 모든 신체 부위를 사용해서 춤을 추는데, 이곳에 들르는 관광객들이 누구나 한 번씩은 볼 정도로 인기가 많다.
에르나쿨람 근교에도 볼거리가 있다. 동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칼라디(Kalady)는 힌두교를 크게 일으킨 힌두교 대학자이자 성인인 샹카라의 고향이며, 에르나쿨람에서 얼마 안 떨어진 알라푸자(Alappuzha)까지 가면 거기서부터 콜람(Kollam)까지 강을 따라 배를 타고 가며 수로여행을 즐길 수도 있다.
인도에는 매력적인 볼거리가 많지만, 그 여행 과정은 몹시 피곤하고, 특히 불교 성지나 주요 관광지에서는 더욱 심하다. 그러나 자연이 아름답고 인심이 넉넉한 케랄라 지방에 가면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면서 인도의 또 다른 매력을 엿볼 수 있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 여행 에피소드
말라야투르에 가서 산 정상에 있다는 사도 도마를 위한 교회를 찾아가려니 막막했다. 그때 마침 성당 근처에서 사제복 차림의 서양 신부와 인도인 청년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가가 길을 물으니 신부님은 갑자기 하늘을 향해 잠깐 기도한 후, 이 인도인에게 약간의 돈을 주면 안내해 줄 것이라고 했다. 선선히 승낙한 후 올라가다 얘기를 나누어 보니 그 인도인 청년은 마침 신부님에게 일자리를 부탁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그때 마침 내가 나타났으니 아마 신부님은 하느님이 나를 보내주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예수 그림이 많이 붙어 있었고, 이끼 낀 바위가 많아서 매우 미끄러웠다. 힘들게 올라가 보니 교회가 있었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그리고 옆의 바위에는 커다란 발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청년의 말에 따르면 그게 바로 ‘도마 사도’의 발이라고 했다. 보통 사람의 두 배 크기여서 실제 사람의 발 같지는 않았다. 볼 것은 별로 없는 곳이었지만, 인도 기독교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찬송가를 부르던 시간이 호젓하고 좋았다.
>> 여행정보
에르나쿨람까지는 기차나 버스가 잘 연결되어 있다. 에르나쿨람에서 코치까지는 버스나 페리를 탄다. 칼라디는 에르나쿨람에서 일단 버스로 알루바(Aluva)까지 간 후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탄다. 1시간 정도 걸린다. 말라야투르는 칼라디에서 버스로 20분 걸린다. 말라야투르 산 정상까지는 매우 미끄럽고 1시간 정도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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