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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세 멈춘곳에 기업통합, 다운 사이징
여류간판스타 칼라 피오리나의 부각과 몰락은 경영계의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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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HP는 종업원들에게도 훌륭한 직장이었다. HP의 창업자들은 선구적인 ‘움직이는 경영(Management by Walking Around)’ 원칙을 확립해서 회사 지도자들이 언제나 종업원들이 언제나 종업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했다. 또한 출퇴근 기록기를 없애고 유연한 작업 스케줄을 도입했다. 당시 미국의 대기업 가운데 HP처럼 운영 권한을 분권화하고 노동자들에게 많은 권리를 부여하는 곳은 손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이들은 월등한 임금과 복지 혜택을 제공했다. 더 나아가 이런 자랑스런 기업 전통을 명문화하기 위해 믿음과 개방성을 강조하는 회사 공식 문서 ‘HP방식(HP Way)’을 채택하기도 했다. HP를 겨냥한 비난이라면 단 하나, 예전부터 고위 경영진에 여자가 없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를 준비해가는 도안 이 모든 것이 예전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실험성을 자랑하던 회사 구조는 네트워크 시대에 잘 들어맞지 않았다. 특이한 관행들-지금이라면 HP에 고용하지 않을 유형의 노동자들에게 87시간 분의 임금을 주던 것과 같은-은 계속해서 불필요한 잡음을 일으켰다. 소프트웨어 등 여러 핵심 분야에서 일으킨 기술적 혁신이 사람들에게-일반 대중뿐 아니라 중요한 투자 집단의 인물들에게도-잘 알려지지 않았다. 경쟁사들은 수면으로 떠오르고, 인터넷 사업은 지지부진 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1999년 중반, 휴렛 팩커드는 다시 한 번 파격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칼턴 S. 피오리나(칼리 피오리나)를 사장 겸 CEO로 임명한 것이다. 여성 최초로 다우존스 산업 지수를 이루는 기업을 이끌게 된-그리고 최초로 HP 외부에서 영입된 CEO인-마흔다섯 살의 칼리 피오리나는 AT&T의 자회사인 루슨트 사 출신의 베테랑이었는데, 취임과 더불어 대대적인 기업 개편에 착수했다. “우리는 회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라고 그녀는 당당히 선언했다. 그런 뒤 피오리나가 단행한 일련의 조치들은 HP의 전통에 익숙해져 있던 많은 사람들을 아연케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종업원, 고객, 투자자들을 포함해서-가운데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내는 이들도 많았다.
차고에서 시작한 실리콘 밸리 대기업의 신화가 아직 사람들에게 낯설던 50년전, 스물여섯 살 동갑내기인 두 엔지니어가 북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조그만 차고에서 전자 제품들을 개발하고 있었다. 연이은 실망 끝에 마침내 ‘HP 200A 저항 흡수 오디오 발진기’라는 혁신적인 제품이 태어났을 때, 공동 개발자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의 수중에 남은 돈은 겨우 538달러뿐이었다. HP 200A는 사운드 장비를 테스트 하는 도구였는데,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는 이를 주문 계약하면서 특허까지 사버렸다. 월트 디즈니는 여덟 대의 HP 200A를 주문했고, 이 장비가 디즈니의 획기적인 영화 <팬터지아>의 제작에 중요한 구실을 함에 따라, 휴렛 팩커드는 혁신적인 전자 기업의 길 위에 성큼 올라서게 되었다.
휴렛과 팩커드는 처음부터 종업원들과 맺는 관계를 매우 중시해서, 이 분야에도 제품 개발 못지 않은 창의적 에너지를 쏟았다. 업무 공간 자체를 개방적으로 꾸몄으며-임원들의 사무실도 문이 없었다-, ‘오픈 도어 정책(Open Door Policy)’을 공식화해서 전 영역에 상호 신뢰의 분위기를 정착시켰다. 거기다 이제는 유명해진 ‘움직이는 경영’ 원칙을 통해서 관리자와 노동자들이 훨씬 더 깊이 있고도 효과적인 관계를 맺도록 했다.
1950년대에는 제품과 인력 분야 양쪽에서 모두 중대한 전환이 이어졌다. ‘HP 524A 고속 주파수 계수기’와 같은 제품들이-라디오 방송국들이 연방 정부의 규정에 맞추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연속적으로 성공을 거둠에 따라 HP의 공장은 점점 바빠졌다. 이익은 연구 개발에 재투자 되었고, 공동 경영자들은 벤처 캐피털리스트들에게서 얻은 빚에서 놓여났다. 게다가 이들은 플로터(선박이나 비행기의 위치 등을 지도나 종이에 찍어 표시하는 도구: 역자주) 제조 회사까지 인수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프린터 사업의 토대이자 기업 공개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이러는 동안 시대를 앞선 HP의 경영 원칙은 최고 수준의 젊은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광범위하게 끌어 모았다. 1957년에 이들은 회사의 독특한 목적과 경영 스타일을 ‘HP 방식’이라는 이름으로 공식화했다. 다음 해에 HP는 회사를 독자적인 손익 책임성을 갖는 몇 개의 개별 부문으로 나누어 팰러앨토의 본사 바깥으로 떠나 보냈다. 이 개별 부문들은 맡은 제품을 독자적으로 개발, 제조, 마케팅하고, 실적에 따라 차후 R&D 자금을 지원받게 되었다. 1959년에 HP는 세계로 발을 넓혀 독일에 생산 공장을 세우고, 스위스에 유럽 본사를 열었다. 이들은 또한 스톡옵션 계획을 종업원 후생 복지 제도에 포함시켰으며, 최초로 현금 이익 분배 프로그램을 제도화했다.
1960년대는 ‘자유 근무제’와 ‘계산기’의 시대였다. 자유 근무제는 1967년 독일의 공장에서 처음 시행되었는데, 그 후 5년여 만에 회사 전역에서 출퇴근 기록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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