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9) - Boeing(하)
시련으로 단련된 항공계 일인자


사업다각화와 끊임없는 기술개발로 도전자 따돌려



▲ 비행기가 편리한 여행수단이란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보잉사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보잉이 비행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919년에 그는 파일럿 한 명과 함께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에서 시애틀로 60통의 편지를 싣고 날아왔다. 이것은 미국으로 배달된 최초의 국제 항공 우편이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민간 항공기 모델을 만들었고, 그 중에는 최초로 레이니어 산을 넘은 것도 있다. 육군 항공부도 전투용 복엽기를 상당량 주문했지만, 보잉은 다양한 분야의 고객을 확보해서 비행기를 꾸준히 만들고 팔지 않으면 회사를 지탱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그는 캔자스 주에 있는 ‘스티어먼 에어크래프트 회사’를 매입했고, ‘보잉 비행학교’를 열었다. 찰스 린드버그가 최초로 ‘뉴욕 파리’ 간 대서양 횡단 단독 비행에 성공한 1927년에 보잉은 미국 우체국과 계약을 맺고, 그 동안 눈독들여온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간 우편 항로를 운항하기 시작했다.

▲ 전략 폭격기로 불리우는 B-29는 2차대전을 종식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어느덧 비행기 운항과 판매 양쪽 분야가 모두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는 승객과 우편물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송하기 위해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의 전신인 ‘보잉 에어 트랜스포트’를 설립했다. 이 시기에는 금주법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보잉의 부인 버사는 오렌지 맛 탄산 음료수로 운항 출범식을 치렀다. 그 다음 해, 100만 파운드에 이르는 우편물 및 속달 소포와 1,900명 가까운 승객이 이 22.5시간의 항공 여행을 했다. 사람들은 차츰 비행기 여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뒤이어 촉발 된 수요는 보잉 사를 이후 수십 년 동안 정상의 위치에 머물게 했다. (물론 이에는 군납 수요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 나중에는 우주 개발 산업도 큰 몫을 했다.)

그 후로 세상에는 많은 변화가 이어졌다. 하지만 보잉 사는 끊임없는 제품 라인 확장으로 언제나 업계를 지배했다. 이들은 비행기를 건조했으며, 엔진, 프로펠러 등의 부품도 만들었다. 우편물도 배달했다. 공항도 관리하고, 항공사도 운영했다. 복엽기가 사라지고 단엽 비행기 시대가 열렸을 때도 변화를 주도한 것은 보잉 사였다. 이들의 양키 클리퍼 기는 최초의 대서양 횡단 정기 우편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다. 호사스런 스트라토라이너 기는 진주만 공격 이후 군용 C-75기로 다시 만들어졌다. 그 다음에 나온 것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B-29기 이다. 전쟁이 끝난 뒤 정부 계약들이 다시 취소되면서 대량 해고가 뒤따랐지만, 이번에는 광범위한 민간 비행기 주문이 그 자리를 메꾸어 주었고, 보잉 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제트 비행기가 개발되고 국방부 주문이 밀려들면서, 보잉 사는 생산 시설을 전력으로 가동할 때가 많았다. 1956년 윌리엄 보잉이 죽었을 때, 보잉 사의 비행기들은 지구 일주도 할 수 있는 성능을 갖추었다. 그리고 통근 승객들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항공기 승객이 기차 승객을 추월하게 되었다.

▲ 보잉 747이 스페이스 셔틀을 싣고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이륙하고 있다. 보잉사는 우주운송분야에 없어서 안될 독보적인 존재다.
1960년대에 미국과 보잉 사는 함께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케네디 대통령은 유인 달 탐사 계획을 발표했고, 보잉 사는 정부에 2,000명의 실무 인력을 지원해주었다. 보잉 사의 달 궤도 선회 우주선은 적절한 착륙 장소를 탐색했고, 월면차는 달의 대지를 탐험했다. 새턴 V 1단계 부스터는 아폴로 호를 우주로 쏘아 올렸다.

보잉 707기는 오랫동안 정부 요원들의 이동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 대통령이 탄 비행기는 ‘에어 포스 원’ 이라는 호출 부호를 썼다. 1962년에 두 대의 707기가 대통령 전용기로 지정된 뒤, 이들 비행기는 공식적으로 ‘에어 포스 원’을 영구 호출 부호로 삼게 되었다. 이 비행기들은 1990년 까지 대통령 전용기로 이용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것도 역시 보잉 사의 747기였다.

그러나 신기술 비행기들이 계속 개발되는 중에도-그 가운데는 490명의 승객을 대서양 너머로 운송할 수 있는 747 점보 제트기도 있었다-보잉 사에는 대량 해고가 빈번했다. 1970년 미 정부가 초음속 운송 프로그램을 돌연 중단하자, 5만 명에 이르는 직원이 해고되었다. 보잉 사는 다시 한 번 사업 다각화 전략으로 이에 맞섰다. 컴퓨터 서비스 회사를 만들고, 오리건 주 동부에 관개 사업을 실시하고, 버진 아일랜드에 바닷물 염분 제거 공장을 세우는 것 등이 그 방책이었다. 이들은 또 컬럼비아 강가에 세 대의 대규모 풍력 터빈을 세우고, 경찰 업무용 음성 변조기를 만들었으며, 몇몇 자치 단체에서 쓰는 경전철 차량을 제조했다. 이렇듯이 변하는 세월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 또한 많았다.

하지만 이런 사업 다각화 전략에도 불구하고 보잉 사의 핵심은 언제나 민간 항공기, 군수 제품, 우주 산업 관련 용품들이었다. 보잉 사의 지도자들은 모든 사업 부문에서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오랜 계명을 따라 1996년 로크웰 인터내셔널, 1997년 맥도넬 더글라스, 2000년 초에 휴즈 일렉트로닉스의 통신 위성 사업부와 같은 주요 경쟁사들을 흡수했다. 그러나 몇 달 후에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이 벌인 전례없는 40일 간의 파업은 보잉의 민간 부문과 군수 부문 양쪽에 모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더불어 회사 가치도 53억 달러나 하락되었다.

동맹 파업은 노사 양측에 쓰라린 결과를 안겨주었지만, 파업 종식 후에는 회사도 종업원들도 다시 힘차게 뛰어올랐다. 파업 후 몇 주일 지나지 않아 보잉 사는 승객들이 비행중에 소지한 노트북 컴퓨터로 인터넷 서핑과 이메일 확인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하지만 그 후 곧 최대 경쟁사 에어버스 인더스트리즈가 신규 비행기 수주 건수에서 처음으로 보잉 사를 추월했다고 발표하자, 보잉 사는 다시 한 번 흔들렸다. 게다가 에어버스의 새 슈퍼점보 제트기는 이전까지 보잉 사의 대형 대서양 횡단 기종들로 향하던 관심과 매출을 광범위하게 끌어가고 있다.

그 동안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보잉 사는 얼른 그 해결책을 내놓았다. 초대형 ‘747x스트레치’가 그것이다. 스트레치 기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 스스로 민간 항공의 세계를 열어젖힌 이래 1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보잉 사는 이보다 더한 어려움도 수없이 극복했기 때문이다.

by 100명 2007. 4. 25. 2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