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시련으로 단련된 항공계 일인자
사업다각화와 끊임없는 기술개발로 도전자 따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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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세상에는 많은 변화가 이어졌다. 하지만 보잉 사는 끊임없는 제품 라인 확장으로 언제나 업계를 지배했다. 이들은 비행기를 건조했으며, 엔진, 프로펠러 등의 부품도 만들었다. 우편물도 배달했다. 공항도 관리하고, 항공사도 운영했다. 복엽기가 사라지고 단엽 비행기 시대가 열렸을 때도 변화를 주도한 것은 보잉 사였다. 이들의 양키 클리퍼 기는 최초의 대서양 횡단 정기 우편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다. 호사스런 스트라토라이너 기는 진주만 공격 이후 군용 C-75기로 다시 만들어졌다. 그 다음에 나온 것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B-29기 이다. 전쟁이 끝난 뒤 정부 계약들이 다시 취소되면서 대량 해고가 뒤따랐지만, 이번에는 광범위한 민간 비행기 주문이 그 자리를 메꾸어 주었고, 보잉 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제트 비행기가 개발되고 국방부 주문이 밀려들면서, 보잉 사는 생산 시설을 전력으로 가동할 때가 많았다. 1956년 윌리엄 보잉이 죽었을 때, 보잉 사의 비행기들은 지구 일주도 할 수 있는 성능을 갖추었다. 그리고 통근 승객들을 제외하면 처음으로 항공기 승객이 기차 승객을 추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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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 707기는 오랫동안 정부 요원들의 이동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 대통령이 탄 비행기는 ‘에어 포스 원’ 이라는 호출 부호를 썼다. 1962년에 두 대의 707기가 대통령 전용기로 지정된 뒤, 이들 비행기는 공식적으로 ‘에어 포스 원’을 영구 호출 부호로 삼게 되었다. 이 비행기들은 1990년 까지 대통령 전용기로 이용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것도 역시 보잉 사의 747기였다.
그러나 신기술 비행기들이 계속 개발되는 중에도-그 가운데는 490명의 승객을 대서양 너머로 운송할 수 있는 747 점보 제트기도 있었다-보잉 사에는 대량 해고가 빈번했다. 1970년 미 정부가 초음속 운송 프로그램을 돌연 중단하자, 5만 명에 이르는 직원이 해고되었다. 보잉 사는 다시 한 번 사업 다각화 전략으로 이에 맞섰다. 컴퓨터 서비스 회사를 만들고, 오리건 주 동부에 관개 사업을 실시하고, 버진 아일랜드에 바닷물 염분 제거 공장을 세우는 것 등이 그 방책이었다. 이들은 또 컬럼비아 강가에 세 대의 대규모 풍력 터빈을 세우고, 경찰 업무용 음성 변조기를 만들었으며, 몇몇 자치 단체에서 쓰는 경전철 차량을 제조했다. 이렇듯이 변하는 세월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 또한 많았다.
하지만 이런 사업 다각화 전략에도 불구하고 보잉 사의 핵심은 언제나 민간 항공기, 군수 제품, 우주 산업 관련 용품들이었다. 보잉 사의 지도자들은 모든 사업 부문에서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오랜 계명을 따라 1996년 로크웰 인터내셔널, 1997년 맥도넬 더글라스, 2000년 초에 휴즈 일렉트로닉스의 통신 위성 사업부와 같은 주요 경쟁사들을 흡수했다. 그러나 몇 달 후에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이 벌인 전례없는 40일 간의 파업은 보잉의 민간 부문과 군수 부문 양쪽에 모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더불어 회사 가치도 53억 달러나 하락되었다.
동맹 파업은 노사 양측에 쓰라린 결과를 안겨주었지만, 파업 종식 후에는 회사도 종업원들도 다시 힘차게 뛰어올랐다. 파업 후 몇 주일 지나지 않아 보잉 사는 승객들이 비행중에 소지한 노트북 컴퓨터로 인터넷 서핑과 이메일 확인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하지만 그 후 곧 최대 경쟁사 에어버스 인더스트리즈가 신규 비행기 수주 건수에서 처음으로 보잉 사를 추월했다고 발표하자, 보잉 사는 다시 한 번 흔들렸다. 게다가 에어버스의 새 슈퍼점보 제트기는 이전까지 보잉 사의 대형 대서양 횡단 기종들로 향하던 관심과 매출을 광범위하게 끌어가고 있다.
그 동안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보잉 사는 얼른 그 해결책을 내놓았다. 초대형 ‘747x스트레치’가 그것이다. 스트레치 기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 스스로 민간 항공의 세계를 열어젖힌 이래 1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보잉 사는 이보다 더한 어려움도 수없이 극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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