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9) - Boeing(상)
항공.우주비행산업의 선구자


거침없는 상상력과 사업다각화를 통해 난관 돌파

창업자:윌리엄 E. 보잉
특징:복엽기에서 시작하여 달 궤도 선회 우주선에 이르기까지 항공 산업과 역사를 같이 함
주요 제품:민간 항공기 및 군용 전투기, 로켓, 인공위성
연간 매출:579억 9,300만 달러
종업원 수:19만 7,000명
주요 경쟁사:에어버스 인더스트리즈, EADS, 록히드 마틴
회장 겸 CEO:필립 M. 콘딧
본사:워싱턴 주 시애틀
창업 연도:1916년
웹사이트:www.boeing.com


▲ 1916년 윌리엄 보잉은 조선소를 사들여 '보잉 에어플레인'사를 설립하고 비행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항공 산업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보잉의 이름은 항상 그 한 구석을 지켜왔다. 라이트 형제가 키티호크 해변에서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한 지 몇 년 후, 윌리엄 보잉은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미국 최초의 에어 쇼에 참가했다. 그 자리에서 항공 산업의 미래를 직감한 그는 몇 년 동안 계속 이 흥미진진한 신종 산업의 면면을 탐구해나갔다. 그는 복엽기 날개에 앉아 비행도 해보고, 초기의 비행 곡예사에게서 비행 수업도 받았으며, 비행정의 설계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가 1916년 시애틀 시의 낡은 조선소를 사서 이를 비행기 제조 공장으로 탈바꿈시켰을 때, 이런 오랜 관심과 노력은 공식적인 사업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그 후 8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보잉 사는 아무리 강성했던 경쟁자들도 우수수 탈락시킨 오랜 세월의 풍파를 꿋꿋이 버텨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비결은 이들이 업계에 떠오르는 모든 기회-국내 항공 우편의 개시부터 대규모 군용 계약, 민간 항공의 약진, 우주 탐사 프로그램의 시발까지-를 거의 남김 없이 움켜쥐고 활용한 것이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민간 제트기 생산 분야 세계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으며, 다양한 인수 합병의 결과 항공 우주선 분야에서도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오고 가는 세월 속에서 수많은 비행기 회사와 우주선 기업들이 차례차례 날개를 접고 사라졌지만, 보잉 사는 거침없는 상상력과 사업 다각화를 통해 눈앞에 닥친 난관들을 매번 돌파해냈다.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출범시켰을 때, 이들은 업계 최초로 기내에 여성 승무원들을 배치했다. 이들은 또한 초기의 다국적 기업 가운데 하나로서, 145개 나라에서 고객을 창출했다. 이들의 방대한 기술 혁신 목록에는 유명한 B-52 폭격기도 들어 있으며, 737 여객기-항공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제트 여객기다-와 달 궤도 선회 우주선 및 새턴 V 부스터-아폴로 우주선을 달로 떠나 보낸 발사기-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지난 시절 이룬 이런 빛나는 위업들이 오늘날 보잉 사에 닥친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실제로 21세기가 시작 되면서 유럽의 한 경쟁사가 슈퍼점보 제트기를 내놓고 세간의 이목은 물론, 보잉 사로 향하던 구매의 손길을 강력하게 끌어당기고 있다. 업계 잡지나 시애틀 지역 신문들은 과감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보잉이 항공기 업계 2위 자리로 주저앉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예견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회사 안팎의 진단에 보잉은 다시 한 번 파도와 맞서 싸울 준비를 갖추고 있다.

▲ 1916년에 최초로 개발한 복엽식 비행정 B&W호 앞에 서있는 웨스터벨트(왼쪽)와 보잉.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역사적인 첫 동력 비행에 성공했을 때, 디트로이트 태생의 예일 공과대학 졸업생 윌리엄 보잉은 부를 찾아서 태평양 연안 서북부 지역으로 갔다. 당시는 벌목업이 한창 성행했는데, 스물두 살의 젊은 보잉은 워싱턴 주 그레이즈 하버 근처의 울창한 삼림을 개발해서 금세 큰돈을 벌었다. 그뒤 시애틀에 정착한 보잉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에어 쇼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에어 쇼는 그를 매혹시켰고, 그는 시애틀로 돌아오자마자 해군 소속 엔지니어 조지 콘래드 웨스터벨트를 만나 함께 비행기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MIT에서 항공학 코스를 이수한 웨스터벨트는 항공 여행에 대한 보잉의 열정에 공감했다. 두 사람은 함께 초기형 복엽 비행기를 타고 날았고-파일럿과 승객이 하나의 날개 위에 앉아야 하는 모델이었다-, 시애틀의 유니버시티 클럽에서 다른 여러 기종들을 살펴보았다. 보잉은 1915년에 캘리포니아로 가서 비행 수업을 받았는데, 떠나기 전에 친구에게 좀더 실용적인 비행기를 설계해볼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웨스터벨트는 쌍부주 비행정-두사람의 성을 따서 B&W라 이름 붙은-을 설계했고, 보잉이 돌아오자 함께 건조 작업에 착수했다.

보잉은 유니언 호수 근처에 격납고를 짓고, 1916년 초에 두 대의 B&W 비행정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웨스터벨트가 해군의 명령에 따라 동부로 전출되자 보잉은 혼자 힘으로 비행기 제작을 마무리지었다. 6월 15일, 약속한 파일럿이 시간에 늦자 그는 ‘블루빌’이라는 애칭의 비행기를 직접 몰고 처녀 비행을 시도했다. 그리고 정확히 한 달 후 ‘퍼시픽 에어로 프로덕츠 회사’라는 이름으로 정식 비행기 제조 회사를 출범 시켰다. 그는 회사 주식 1,000주 가운데 998주를 산 뒤, 제조 시설을 듀워미시 강가에 있는 구 헬스 조선소로 옮겼다. 1년 뒤 그는 회사 이름을 보잉 에어플레인 회사로 바꿨다.

기대와 자신감이 가득했던 보잉은 파일럿, 목수, 재봉사 등 스물 여덟 명의 직원을 뽑았다. B&W는 팔리지 않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은 처음으로 전투에 비행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보잉은 해군에도 훈련용 비행기가 필요할 것이며, 자신의 모델 C가 그에 아주 적합할 것이라고 믿었다. 플로리다 주에서 시범 비행이 벌어졌고, 이를 본 해군 관리들은 50대의 비행기를 주문했다. 보잉은 이 계약을 맞추기 위해 종업원을 337명으로 늘렸지만, 전쟁이 끝나자 주문이 반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이런 패턴은 이후로도 심심찮게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낙담하지 않고 지역 상점에 판매할 가구를 만들고, 또 일명 바다 썰매라고 하는 편평 바닥의 배도 만들며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by 100명 2007. 4. 25. 2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