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7)
인텔 (Intel) (하)-초고속 성장에도 복병은 있다..
현재 활로개척에 안간힘






▲ 2000년 6월 펜티엄4를 발표하는 인텔CEO 크레이그 배릿. 인텔은 내외의 도전에 중대한 시련을 맞고 있다.
1972년에는 이전 제품보다 성능이 두 배 높은 8008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출시되었다. 각종 장치들이 이를 응용하기 시작해서, 8008은 어느새 식품점의 저울, 식당의 재고 관리 장치, 자동차 정지등 따위에도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엘테어에도 적용되었다. 개인용 컴퓨터가 날아오르면서, 인텔도 함께 고공 질주를 시작했다. 몇 년 후 <포춘>지는 인텔을 '70년대 기업계의 개가'중 하나로 지목했다.

1981년에 이르자,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제품은 8086과 8088로 이어졌다. 이 제품들은 비밀리에 개인용 컴퓨터 개발을 준비하던 IBM의 눈길을 끌었다. 당시 인텔은 연간 1만 건의 주문만으로도 행복해하던 수준이었다. 그러나 8088을 채택해서 개발된 IBM-PC는 8088에 1000을 곱한 것보다도 많은 수의 매출을 달성했고, 인텔은 유명 기업의 대열에 우뚝 서게 되었다. 그렇지만 물론 인텔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1982년에 이들은 다른 마이크로프로세서보다 성능이 세 배 정도 우수한 286칩을 출시했다. 이어 1985년에 나온 386칩은 초당 500만 개가 넘는 명령을 수행할 수 있었다. 1989년에 나온 486은 처리 속도가 첫 제품 4004의 50배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메인프레임 컴퓨터와도 대등한 성능을 자랑했다. 그런 뒤 1993년에 인텔은 펜티엄을 출시했다. 310만 개의 트랜지스터로 초당 9,000만 개의 지시어를 수행하는 펜티엄 프로세서는 그 성능이 4004 모델의 1,500배에 이르렀다. 이 제품이 인텔 역사에 하나의 이정표가 되리라는 것을 깨달은 그로브- 당시 인텔의 사장 겸 CEO-는 이를 적극 홍보해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케팅 캠페인에 1억 달러가 배정되었고, TV와 신문 잡지를 통해 광범위한 광고가 집행되었다. 사람들은 그로브를 이해하지 못했다. 소비자가 아무리 인텔을 좋아하기로서니, 상점에 가서 직접 인텔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어쨌건 앤디 그로브는 '인텔 인사이드' 캠페인을 통해 강력한 마케팅을 전개했다. 인텔은 당시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의 1위 업체였지만, 저가의 모조품들에게 시장을 잠식당하고 있었다. 광고의 목적은 소비자들에게 인텔 칩의 가치를 인식시키는 것이었지만, 인텔과 협력하는 컴퓨터 제조업체들을 간접적으로 보상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들은 인텔 제품을 사용하는 PC 제조업체에게 6퍼센트의 리베이트를 주는 협동 광고프로그램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외에도 상당한 액수의 돈을 추가로 주어 인텔 제품 사용을 광고에 알리게 했다.) 그로브가 CEO가 된 1987년, 인텔은 소비자 시장을 대상으로 한 광고 예산이 없었다. 그러나 1990년 말에 이르렀을 때, 그 예산은 연간 1억 달러를 초과했다. 1999년 펜티엄Ⅲ칩이 세상에 나왔을 때 이러한 전략은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실행되었다. 펜티엄Ⅲ의 전 세계 광고 비용은 1억 5,000만 달러에 이른 것으로 추산된다. 이 광고의 목적은 인텔을 최고의 닷컴 기업으로 자리매기고, 동시에 이들의 새 제품이 인터넷 생활을 훨씬 즐겁고 편리하게 해준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인텔의 브랜드 인지도가 급격하게 상승해서, 소비자들은 '인텔 인사이드' 마크가 달린 컴퓨터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세간에는 윈도우 운영 체제로 시장을 지배하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을 한데 묶어서 '윈 텔' 쌍두마차가 개인용 컴퓨터 세계를 끌고 간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그로브는 1997년에 회장이 되었고, 취임 몇 달 후에는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에 뽑혔다. 그로브는 다른 고위 직책들을 점차 크레이그 배릿에게 넘겨주었다. 인텔은 PC의 멀티미디어 기능을 강화시키는 신기술을 선보였고, 광고로 유명해진 원색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브랜드 이미지를 더욱 제고시켰다. 그뿐 아니라 업계의 시장 세분화 경향에 대처하기 위해 회사를 세 개의 부문-전문가급, 우수 성능, 기본 성능 PC-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10년에 걸친 그칠 줄 모르던 성장 끝에 이들이 맞닥뜨린 것은 갑작스런 추동력의 상실이었다. 화상 회의 같은 신규 분야로 진출하려던 시도들이 실패로 돌아갔다. 소비자들은 월드와이드웹에 접속하는 데 그다지 복잡한 장치를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이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연방 공정거래위원회(FTC)가 인텔이 경쟁을 억압한다며 이들을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제소한 것이다. (하지만 인텔은 마이크로소프트와는 달리 FTC와 합의를 이루어 문제를 해결했다.) 이러는 동안 시릭스 및 어드밴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시즈 같은 신생 기업들이 시장에 진입했으며, 1998년에는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수입이 감소하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배릿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인텔의 중앙집권화된 경영 시스템을 분산시켰으며, 현금을 풀어서 일련의 인수를 단행했다. PC 마이크로프로세서에만 힘을 집중하던 시절은 끝났고, 배릿은 인텔의 역량을 컴퓨터 칩뿐 아니라 네트워크 장비와 정보 기기용 반도체 생산에도 고루 분배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전자 상거래 및 소비자 가전과 같은 새로운 분야의 문도 두드렸다.

21세기로 넘어온 뒤에도 배릿은 인수와 확장을 계속해나갔다. 하지만 PC 영역은 여전히 인텔이 벌어들이는 수익의 90퍼센트를 이루었으며, 이익의 100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들의 첫 무기였던 컴퓨터 칩의 성능을 강력하게 개선해나가는 노력도 멈추지 않고 있다. 공동 창업자로서 지금은 명예 회장의 자리에 있는 고든 무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약 자동차 산업이 반도체 산업과 같은 속도로 발전했다면 롤스로이스는 연비가 1갤런당 100만 마일 정도 되었을 것이고, 주차비를 내느니 차라리 버리는 게 돈이 덜 들었을 것이다." 만약 인텔이 그때 거기 있었다면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무어는 그렇다고 암시하는 것 같다.

by 100명 2007. 4. 25. 2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