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7)
인텔 (Intel)(상) -'두뇌'를 만드는 인텔, 미래 가능성 예견




회사 개요
창업자: 로버트 노이스, 고든 무어
특징: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발명하여 컴퓨터 혁명의 길을 닦음
주요제품: 컴퓨터 칩, 네트워크 및 커뮤니케이션 장비
연간 매출: 293억 8,900만 달러
종업원 수: 7만 200명
주요 경쟁사: 어드밴스트 마이크로 디바이시즈, IBM, 모토롤라
명예회장: 고든 무어, 회장: 앤드루 S. 그로브, 사장 겸 CEO: 크레이그 R. 배릿
본사: 캘리포니아 주 샌타 클라라
창업 연도: 1968년
웹사이트: www.intel.com


▲ 인텔의 창업자들. 왼쪽부터 앤드류 그로브, 로버트노이스, 고든 무어.
인텔이 세계 최고의 컴퓨터 칩 생산자가 된 것은 이들이 오늘날 컴퓨터와 휴대폰, 장난감 및 온도조절 장치 등 온갖 물건에 쓰이는 극도로 작은 칩을 발명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이들이 업계 1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지난 30여 년 간 완벽에 가까운 제품을 수백만 개나 만들어낸 탁월한 제조 능력 덕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첨단 기술이 유행의 물결을 타기 전에 한발 앞서 회사를 세우고, 그 후로도 계속 기술적 선도성을 유지하게 한 뛰어난 경영진이 그 핵심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되짚어 보면 거기에는 이들이 실행한 혁명적 광고 캠페인이 어느것 못지 않게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광고의 핵심이 된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라는 짧은 문구는 존재가 희미하던 한 기업을 일약 세계적인 유명 브랜드로 탈바꿈시켰다. 인텔은 컴퓨터 마이크로프로세서라는 비전통적인 제품을 매우 전통적인 방식으로 마케팅 함으로써, 그들의 제품이 소비 세계에 화려하게 등장한 전자제품-컴퓨터-의 핵심을 이룬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부각시켰다. 발빠른 업계진출, 극도로 효율적인 생산 기술, 비범한 경영 능력도 모두 인텔의 급부상에 중요한 몫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끈 그 광고 -원색의 토끼 옷을 입은 기술자들이 춤을 추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이제는 회사의 로고 사운드가 된 네개의 음정으로 끝나는-가 없었으면, 인텔은 지금처럼 세계의 변화를 주도하는 기업이 되니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성공적이 광고와 더불어 인텔은 오늘날 컴퓨터들을 움직이는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의 80퍼센트 이상을 장악했다. 인텔의 손끝에서 이 장치는 오늘날 안 쓰이는 곳이 없을 만큼 널리 대중화되었고, 성능은 그 옛날 미국이 우주선을 날리는 데 사용했던 집채만한 장치들보다도 더 높아졌다. 게다가 이러한 성과는 다른 가전 제품들에도 응용되기 시작해서, 결국 인텔이 이 세상에 일으킨 변화는 이들이 1960년대의 정치 사회적 격동 속에서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꿈꾸었던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버렸다.

마이크로프로세서란 상호 연결된 수천, 혹은 수백만 개의 트랜지스터로 이루어진 조그만 전자 회로로서, 다양한 목적을 위해 데이터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일을 한다. 오늘날 개인용 컴퓨터의 두뇌 역할로 널리 쓰이지만, 그밖에 전화기의 단축 다이얼, 알람 시계의 자동 작동, 더 나아가 자동차의 전자 브레이크 및 도어 록 시스템도 이를 통해 움직이는 것들이다.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발명되기 전에 후자의 기능은 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고, 컴퓨터들은 크기가 집채만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인텔의 공동 창업자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하자, 이 모든 것이 확 바뀌게 되었다.

두 사람이 페어차일드 반도체 회사에서 함께 일하던 시절, 직접 회로 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서 마침내 하나의 실리콘 칩 위에 올라갈 만큼 크기가 작아졌다. 동료들은 이것의 실용성에 의문을 품었지만, 노이스와 무어는 이 기술이 가속화되는 속도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간파했다. 실제로 무어는 1965년에 직접 회로 기술은 기하급수적이기는 하지만 예측 가능한 페이스로 발전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나중에 '무어의 법칙'이라고 불리게 된 그의 견해는 18~24개월마다 직전 제품의 두 배 성능을 갖춘 칩이 나온다는 것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판단은 놀라울 만큼 정확한 것으로 드러났다.

노이스와 무어는 이 첨단 직접 회로를 생산하기 위해 1968년 페어차일드를 떠난 뒤 켈리포니아 주 마운틴뷰에 'NM 일렉트로닉스'라는 회사를 세웠다. 이들과 비전을 같이 한 열두 명의 과학자가 함께 결합했는데, 그 가운데 앤드루 그로브라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 과학자가 운영 책임자로 지명되었다. 얼마 후 이들은 회사 이름을 '인테그레이티드 일레트로닉스(integrated electronics, 집적 전자공학)'를 줄인 '인텔'로 바꾸고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인텔은 처음부터 제품의 상용화 가능성에 중점을 두었다. 그것은 당시 주도 기술보다 비용이 백 배 이상 더 드는 일이었지만, 노이스, 무어, 그로브 세 사람은 크기가 작고 수행 능력이 뛰어나며 에너지 요구량이 적은 인텔의 회로가 곧 컴퓨터 제조업체들의 관심을 끌 것이라고 확신했다. 첫해에 이들의 수입은 2,700달러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차츰 소문이 나면서 업계의 관심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일본 회사에서 프로그램 가능 전자 계산기에 실을 칩을 설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엔지니어 테드 호프는 이에 필요한 칩들을 하나의 플랫폼 위에 배열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고, 이렇게 해서 세상에는 마이크로프로세서라는 것이 태어났다. 이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인텔에도, 또 이들이 일으킨 산업의 미래에도- 이 구조가 다른 응용 분야에 수정 없이 그대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 후 인텔에게는 약진의 날들이 이어졌다. 1970년에 개발된 '다이내믹 랜덤 액서스 메모리' 약칭 DRAM 칩은 세계 반도체 기기 시장에서 판매 1위를 차지했다. 이들은 미래의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샌타클라라 시 부근 26에이커 규모의 배 과수원에 넓은 사무실과 공장을 지은 뒤 그리로 이주했다. 이주 몇 달 후 인텔은 4004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출시했다. 이 놀라운 기기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인 에이악과 동일한 수준의 컴퓨팅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에이악은 3,000평방피트 면적위에 1만 8,000개의 진공관을 배열해서 만든 거인으로, 초당 6만 개의 명령 -당시로서는 놀라운-을 수행했다. 하지만 인텔의 제품은 엄지손톱보다 작은 공간에 들어찬 2,800갱의 트랜지스터를 가지고 똑 같은 일을 수행해냈으며, 가격은 20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4004 마이크로 프로세서 출시와 더불어 인텔과 컴퓨터 혁명은 함께 손을 잡고 나란히 활주로에 올라섰다.

by 100명 2007. 4. 25. 2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