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6)
나이키 (Nike) (상)




회사 개요
창업자: 빌 보어먼, 필 나이트
특징: 스포츠 슈즈를 문화적 아이콘으로 탄생시킴
주요 제품: 스포츠 신발류, 의류, 장비, 액세서리
연간 매출 87억 7,700만 달러
종업원 수: 2만 700명
주요 경쟁사: 아디다스-살로몬, 필라, 리복
회장 겸 CEO: 필립 나이트
본사: 오리건 주 비버턴
창업 연도: 1962년
웹사이트: www.nike.com


▲ 마이클 조던의 전성기에 '에어조던'이란 제품을 출시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진은 에어조던광고.
마이클 조던이 코트를 지배할 때 스포츠 슈즈 또한 세계를 지배했다. 그리고 그 시장의 제왕은 의문의 여지 없이 나이키였다. 오리건 주에 기반한 이 회사는 소박한 운동화를 패션 감각 스포츠 용품으로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이들은 극히 한정된 활동을 목적으로 디자인된 고기능 신 모델들을, 해가 갈수록 더 요란하고 기발해지는 광고 캠페인과 기능과 이름에 실어서 쉴새없이 내놓았다. 건강에 관심이 많은 중장년층 소비자들은 조깅, 에어로빅, 걷기, 골프 등 각자 좋아하는 운동을 즐기기 위해 나이키로 달려가서 원하는 신발을 골랐다. 게다가 나이키가 유명한 스포츠 스타들을 광고 모델로 삼기 시작하자, 마치 전 세계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마이클 조던, 미아 햄, 타이거 우즈가 되려고 마음먹은 것처럼 보였다.

나이키는 스포츠 목적에 부합하면서도 패션 감각을 갖춘 신발이라는 혁명적 아이디어를 냈지만, 이것을 실제로 만들어내고 보급하는 일에도 발군의 능력을 발휘한 까닭에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이들은 때때로 뜨거운 비난의 표적이 되었는데-때로는 타당하고 때로는 그렇지 못한-, 해외 노동자들을 착취한다는 점, 브랜드 이미지를 예술 형식처럼 만든다는 점, 가격을 터무니없이 높게 매긴다는 점, TV 전파를-경기장의 사이드라인을 빼고라도-그 ‘갈고리’ 로고로 뒤덮는다는 점 등등이 모두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나아가서는 유명 운동 선수들을 사방팔방의 광고 홍보에 지나치게 팔아먹는다는 점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빌 보어먼은 아내의 와플기계러 신발 밑창을 찍어 아스트로 그래버(사진)란 제품을 만들어 팔았는데 최초츼 히트작이 됐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나이키는 현장 수행 능력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동안 나이키는 열광의 대상 자체였다. 1994년에서 1997년 사이에-이미 회사가 상당한 성숙 단계에 있던-나이키의 매출은 92억 달러로 150퍼센트 가까운 성장을 이루었다. 사이클링 장비 등 여러 분야의 신규 브랜드가 계속 도입되었다. 사람들 눈이 닿는 모든 곳에 갈고리 로고가 있었다. 한동안 나이키는 전 연령층이 가장 애호하는 액세서리였다. 그런데 돌연 다른 신발이 투하되었다. 하이킹 부츠와 캐주얼 가죽 신발이 아이들에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열광은 주춤하고, 경쟁사들은 틈새를 파고들었다. 나이키는 ‘인기’ 목록에서 삭제되었고, 조던은 은퇴했다.

그렇지만 나이키는 여전히 업계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힘이다. 이들이 현재 시장에 내놓은-그리고 대체로 호평을 받는-신발 모델은 500종에 이르며, 의류는 그보다도 더 종류가 많다. 이들은 대형 쇼핑몰 ‘나이키타운’을 운영하고 있으며, 조던을 주제로 한 몇 개의 특별 아웃렛 매장도 열었다. 그리고 여전히 백여 개 나라에서 해마다 수십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나이키가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언제나 1위 자리에 익숙해 있던 나이키에게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상황이다.

1962년에 오리건 주 유진 시가 혁명의 발상지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오리건 대학 캠퍼스는 오래 전부터 꽤 이름난 육상 활동의 본거지였다. 모든 것은 빌 보어먼이-1948년부터 수석 코치로 일한-깊은 생각 없이 필 나이트와 팀을 이루어 일본 운동화 타이거를 BRS(블루 리번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판매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1964년까지 1,800켤레의 신발을 팔았다. 그러다가 4년 후에 보어먼이 직접 신발 디자인을 해서 내놓았더니, 전체 신발 가운데 그 모델이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자신감과 아이디어로 충만해진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직접 신발을 디자인해서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라텍스와 가죽으로 만든 이 신발은 유난히 가벼운 밑창이 특징이었는데, 이것은 보어먼 아내의 와플 기계로 만든 것이었다.켤레당 3.3달러의 가격에 젠체 물량 330켤레를 싹 판매한 뒤, 두 사람은 마침내 회사를 차리고 혁명을 시작했다.

▲ 육상선수로 이름을 날린 스티브 프리폰테인(왼쪽)은 나이키의 명성을 끌어 오리는데 큰 힘이 됐다. 오른쪽은 창업자 빌 보어먼.
보어먼 밑에서 훈련을 받은 뒤 스탠퍼드 대학에서 M.B.A.를 받은 나이트는 이 재미난 모양의 신발들을 차 트렁크에 가득 싣고서 육상 경기가 열리는 곳을 찾아단니며 판매했다. 두 사람의 대담함과 독창성은 곧 주목을 받았고 사업은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들은 1971년에 갈고리 로고를 선보였고, 다음 해에 유진 시에서 열린 올림픽 미국 대표 선발전에서 처음으로 나이키 브랜드를 출범시켰다. 그러자 세계 최고 수준의 육상 선수들이-1972년 올림픽 마라톤 경기 상위 입상자 일곱 명 가운데 네 명을 포함해서-나이키를 착용하기 시작했고, 회사는 탄탄대로를 달려나갔다. 1974년이 되자 종업원은 250명으로 불었고, 캐나다와 호주에 영업 지부를 열었으며, 뉴햄프셔 주에 공장을 차렸다. 수익은 480만 달러에 이르렀다.

올림픽 육상 선수 스티브 프리폰테인-보어먼의 제자 중 한명으로, 좋은 스포츠 장비와 스포츠 자체의 진흥을 위해 노력한-의 활동은 그가 1975년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기 전까지 나이키의 전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스포츠 선수들에서 나이키 제품을 신겨서 홍보 역할로 삼은 뒤, 회사의 행보는 더욱 빨라졌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이름을 딴 이들의 회사는 신발 디자인과 비즈니스 양쪽에서 모두 연전연승이었다. 선수들에게 나이키는 신는 즐거움을 주었고, 소매 상인들에게는 파는 즐거움이 되었다. 프로 선수 가운데는 테니스 스타 존 매켄로가 처음으로 나이키와 계약을 맺었다. 1970년대 말 종업원이 2,700명에 이르고 시장의 50퍼센트를 점유하게 되자, 이들은 기업을 공개했다.

by 100명 2007. 4. 25. 2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