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5)
RCA (하)






▲ 라디오로 승승장구한 사노프는 록펠러센터(사진)와 라디오시티를 지었는데 나중에 RCA와 NBC의 본사로 활용되었다.
NBC의 방송 프로그램 가운데 중요했던 최초의 프로그램은 1927년 1월 1일의 로즈볼 경기(대학 미식축구 챔피언 결정전: 역자주)였다. 6년 전 권투 중계와 마찬가지로 로즈볼 중계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에 힘입어 라디오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다. 그때까지 RCA는 GE와 웨스팅하우스가 만든 라디오 수신기를 관매하는 역할만 했으나, 마침내 연구 개발, 생산, 판매 사업부를 모두 인수하고서GE에서 분리되었다. 그런 뒤 이들은 빅터 토킹 머신 회사를 매입하여 축음기도 함께 생산했다. 이때의 인수를 통해 ‘RCA 빅터’로 거듭난 이 회사는 빅터 사의 유명 트레이드마크인 폭스 테리어 개 ‘니퍼’-옛날식 축음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도 함께 가져올 수 있었다. 나중에 이 트레이드마크는 회사의 어떤 제품보다도 더 유명해졌다.

1929년의 주식 시장 폭락은 RCA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다. 소비자들이 라디오 같은 제품을 구매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노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생산 시설을 더 늘리는 한편, 한 서민 극장 체인과 결합해서-여기에는 NBC의 연예인 군단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RKO 영화 스튜디오를 열었다. 그는 또 뉴욕 시에 록펠러 센터와 라디오 시티를 지었는데, 이 건물들은 나중에 RCA와 NBC의 본사로 활용되었다. 사노프의 탁월한 안목을 보여주는 또 한 가지 사례는 그가 블라디미르 즈보리킨이라는 엔지니어를 고용해서 라디오를 앞지르는 새로운 기술, 즉 텔레비전의 개발을 맡겼다는 것이다.

사노프는 1920년에 이미 TV의 가능성을 예견했으며, 거친 화질의 화면들은 RCA가 방송 영역에 첫 걸음을 내디뎠을 때 이미 송신되고 있었다. 이 분야의 개척자 중 한 명이던 즈보리킨은 사노프에게 텔레비전을 개발하는 데는 18개월의 시간과 10만 달러의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10년의 시간과 5,000만 달러의 돈이 들었다. 어쨌건 두 사람은 1939년에 열린 뉴욕 세계 박람회에 RCA 텔레비전을 출품할 수 있었다. 박람회의 개회사를 한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은-RCA가 태어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NBC 라디오에도 자주 목소리를 실어보낸-이 개회식이 중계됨에 따라 전 세계 국가 원수 중 가장 먼저 텔레비전에 출연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자 TV의 상업적 개발은 중단되었다. RCA 공장들은 폭탄 퓨즈, 지뢰 탐지기들을 만들었고, 한편으로는 군인 위문용 여흥 프로그램들도 제작했다. “ 우리의 모든 시설과 인력은 준비가 완료되어 있으며, 각하께 즉각 봉사할 것입니다.” 루즈벨트에게 보내는 편지에 사노프는 이렇게 썼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곧바로 TV 생산을 재개해서, 1946년에 10인치 텔레비전을 375달러 가격에 출시했다. 다음해에 NBC는 라디오 방송의 스타들을 텔레비전으로 이동시켰고, 사노프는 RCA 이사회의 회장이 되었다.

1950년대에 TV가 불길처럼 번져가는 동안 RCA와 NBC는 이 신생 매체의 이점을 한껏 누렸다. 이들은 컬러 방송 초기에도 업계 표준으로 채택된 기술을 내놓음으로써, 정작 컬러 방송을 처음 도입한 CBS를 누르고 앞서가게 되었다. 1954년 NBC가 최초의 컬러 생방송 프로그램인 <토너먼트 오브 로지즈 퍼레이드(Tournament of Roses Parade)>를 내보낸 지 몇 달 뒤에 RCA는 컬러 TV 수상기를 출시했다. 12인치 모델의 가격이 1,000달러에 이르렀지만 그 흡인력은 강력했다. 5년도 지나지 않아 RCA는 50만 대의 수상기를 팔아치웠고, NBC는 당시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던 <보난자(Bonanza)>를 컬러로 방송했다. 1962년에는 TV 프로그램의 2/3가 컬러로 방송되었다.

▲ '오 헤이 오헤이'라는 독특한 음률의 주제곡과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말 달리는 사나이로 상징되는 1960년대 미국 서부극 드라마의 대명사였던 <보난자>의 한장면. TV보급은 영상문화에 혁명을 가져다 주었다.
1970년에 이르자 텔레비전은 없는 곳이 없게 되었고 컬러 TV도 흔해졌다. 이때 RCA는 미국의 우주 비행 실황을 방송함으로써 집에서 이를 지켜보던 수많은 시청자들을 열광시켰다. 이들은 프랑스에 자리잡은 옛 친구 톰슨 사와 조인트 벤처를 이루어서 혁신적인 수상관(受像管)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다음해 데이비드 사노프가 여든 살을 일기로 눈을 감자, RCA는 전혀 예기지 못한 길로 달려나가게 된다.

기술 개발은 1970년대에도 계속되어서, 컬러트랙 TV와 네 시간짜리 가정용 VCR 등이 탄생했다. 컬러 방송 25주년이 되었을 때 RCA는 마치 이를 자축이라도 하는 듯이 1억 대째의 수상관을 생산했다. 그런데 먼 옛날 RCA의 조상 중 하나였던 톰슨 사는 이 무렵 프랑스에서 톰슨 S.A.라는 이름의 국영 기업이 되어 있었다. 톰슨 S.A.는 115개 이상의 자회사를 거느린 지주 회사였는데, 매출의 절반 이상을 첨단 기술 제품을 통해 올리고 있었다.

1986년에 GE는 다시 RCA를(NBC 포함) 인수했다. 당시 64억 달러의 인수 가격은 비석유 회사의 합병으로는 최대 규모였다. 하지만 RCA 생산 제품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GE의 마스터 플랜과 들어맞지 않자, 다음 해에 GE는 RCA와 GE의 소비자 가전 부문을 톰슨에게 팔았다. 톰슨은 이를 운영하기 위해 ‘톰슨 컨수머 일렉트로닉스’라는 자회사를 세웠다. 이들은 1990년대 초반 인디애나폴리스에 미국 본부를 차리고, 1995년에 이름을 ‘톰슨 멀티미디어’로 바꿨다.

한동안 슬럼프를 겪던 RCA의 미국 내 TV 매출이 새로운 경영권 아래서 소폭 상승했다. 이들은 음악 CD의 인기가 상승하는데 주목하여 오디오 라인을 도입했는데, 1990년대 중반에 이르자 이 분야에서 소니에 이어 2위 업체가 되었다. 56인치 텔레비전이나 고성능 캠코더, 고화질 TV 같은 제품들이 속속 제품 라인에 추가되었다.

빛나는 전통 위에 이렇듯 기술 혁신을 더하는 데도, 톰슨 멀티미디어는 초창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고, 이들의 모회사는 이들을 떼어내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조금씩 호전되는 기미를 보인다. 1999년에 미국 사업부-RCA와 GE가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는 2억 2,400만 달러 수익을 기록했다. 이는 전해에 비해 무려 1,400퍼센트가 뛰어오른 수치다. 그 원인을 찾자면 이들이 지난 몇 년 간의 침체기를 딛고 일어서서 계속 매력적인 신제품들을 출시한 것을 꼽을 수 있다. 다시 짚어보면 이는 RCA의 옛 주인이자 미래의 주인인 톰슨이 RCA를 애초에 시장의 강자로 만들었던 개척 정신을 새로이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by 100명 2007. 4. 25. 2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