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5)
RCA (상)




회사 개요
창업자: 토머스 A. 에디슨, 엘리후 톰슨, 에드윈 휴스턴
특징: 미국인의 가정에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보급함
주요 제품: 텔레비전, 캠코더, 기타 소비자 가전 제품
연간 매출: 45억 달러
종업원 수: 2만 2,800명
주요 경쟁사: 마츠시타, 필립스, 소니
S.A. 톰슨, 톰슨 멀티미디어 회장 겸 CEO: 시어리 브레턴
본사: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
창업 연도: 1960년
웹사이트: www.rca.com

▲ 라디오를 최초로 개발한 러시아계 이민자 데이비드 사노프. 그는 방송, 통신 분야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R.M.S 타이타닉 호가 빙산에 충돌한 1912년 4월 14일, 마르코니 무선전신 회사에 근무하던 스물한 살의 라디오 기사는 맨해튼의 사무실에서 이들이 보내는 조난 신호를 받았다. 데이비드 사노프라는 이름의 이 러시아계 이주민 청년은 그 후 72시간 동안 워너메이커 백화점 꼭대기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을 떠나지 않고 점점 끔찍해져가는 바다의 정황을 회사 전신망을 통해 사방으로 중계했다. 그가 배의 침몰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건을 전 세계에 중계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의 상상력에 고통스러운 자극을 가했다.

그 후 마르코니 회사에서 7년을 근무하며 승진을 거듭하는 동안, 그는 이런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을 일반인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1916년이 되자 그의 이런 생각은 마침내 상업적 무선 신호 수신기-그는 이것을 ‘라디오 뮤직 박스’라고 불렀다-라는 확고한 아이디어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기계를 통해서 음악을 비롯, 뉴스나 다른 여러 프로그램을 송신할 수 있다는 것이 사노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악이나 사람 목소리가 집집마다 뿌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노프와 동료들이 이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데는 몇 년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 후 이들은 마침내 라디오 코퍼레이션 오브 아메리카(RCA)라는 회사를 차려서 이 일을 실현해냈고, 사노프는 당연히 거기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사노프는 죽을 때까지 RCA의 핵심이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덧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거인으로 자라난 RCA는 양차 대전을 지원하고, 현장 라디오 생방송의 길을 열고, 방송 송신기와 수신기를 생산하고, 축음기를 제조하고, 활동사진을 만들고, NBC 방송망을 구축하고, 뉴욕 시에 록펠러 센터와 라디오 시티 뮤직 홀을 짓고, 텔레비전을 출시하고, 컬러 TV의 표준을 창출하고, 최초의 컬러 방송 수상기를 생산하고, 그리고 마침내는 우주 여행의 장면들을 미국인들의 안방에 송신하는 역할까지 해냈다.

▲ RCA가 인수한 Victor Taking Machine Co의 신문광고는 '주인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개의 그림으로 유명해져 RCA 축음기의 상표가 되어버렸다.
1971년 사노프가 죽은 뒤, RCA는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몹시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한때 라디오와 텔레비전 분야의 절대 강자였던 이들이 시장의 경쟁을 이겨내지 못하고 급기야 프랑스 기반의 한 회사에게-이 회사는 60여 년 전 RCA의 창업에 도움을 준 역사가 있다-매각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의 RCA는 여전히 전자분야의 유력 기업으로 남아 있으며, 소비자들에게도 친숙하고 신뢰할만한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RCA의 뿌리는 토머스 에디슨과 엘리후 톰슨에게로 거슬로 올라간다. 에디슨과 같은 시대 인물인 톰슨은 필라델피아 소재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였는데, 전기 현상에 매혹된 나머지 동료 교사 에드윈 휴스턴과 함께 전기 회사를 차렸다. 그 시기 에디슨은 뉴저지 주에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를 꾸리고 있었다. 톰슨 휴스턴 사는 1889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이 행사를 위해 에펠탑이 세워졌다-에서 큰 상을 받았고, 3년 후에는 에디슨 제너럴과 합병되어 제너럴 일렉트릭이 되었다. 그러자 톰슨 휴스턴의 두 대표는 프랑스로 돌아가서 비슷한 기업을 새로이 만들었다.

▲ 1922년 최초로 만들어진 RCA 라디오
이 무렵 이탈리아의 전기 기사 굴리엘모 마르코니의 손에서 무선 전신이 탄생했고, 이 발명의 위업은 마르코니 무선 전신 회사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마르코니 무선 전신 회사는 1899년에 미국에 지사를 세웠는데, 그 후 20년 동안 대서양 관통 전신을 보낼 수 있는 집단은 오직 이들밖에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시 해군 차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무선 기술을 미국인의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 일을 제너럴 일렉트릭(GE)에 맡겼다. 이에 따라 GE는 1919년 RCA를 세워서 아메리칸 마르코니 사를 인수하고 무선 전신 관련 제품을 생산, 판매하기 시작했다.

RCA가 태어났을 때 미국에 보급된 무선 수신기(라디오) 수는 5,000대 가량이었으며, 상업적 방송을 하는 곳은 웨스팅하우스뿐이었다. 그러나 1921년 이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 마르코니 사에 있다가 RCA로 옮겨온 데이비드 사노프가 최초로 라디오 스포츠 중계를 실시한 것이다. 잭 뎀프시와 조지 카펜티어 사이에 벌어졌던 이 권투 헤비급 챔피언 전은 30만 명의 청취자를 끌어모았다. 몇 달 뒤에는 월드 시리즈 야구 경기가 최초로 방송되었고, 이러한 수요를 끌어당기기 위해 전국 각지에 방송국들이 생겨났다. 1924년이 되자 라디오 보급 대수는 250만을 넘어섰는데, 그 대부분이 RCA 제품이었다. 찰스 린드버그가 역사적인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 1927년에는 600만 명 가량의 사람들이 라디오로 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라디오의 잠재 가치를 정확히 인식한 사노프는 뉴욕 시의 WEAF 방송국을 사서 전국적 방송을 위한 중앙 방송국으로 만든 뒤, 여기 내셔널 브로드캐스팅 컴퍼니(National Broadcasting Company, NBC)라는 이름을 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 대륙 곳곳에 산재된 25개의 방송국이 NBC의 회원이 되었다.

by 100명 2007. 4. 25. 2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