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4)
J.P.모건 (J.P. Morgan) (하)




그런데 이런 통합 건들은 흔히 자본 가치가 실제 가치보다 훨씬 부풀러진 채 이루어져서, 모건에게 수백만 달러의 투자 중개 수수료 및 주식 인수 수익을 추가로 안겨주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어쨌건 이런 행동-그의 이름을 따서 ‘모거나이징’이라 불린-을 통해서 J.P. 모건은 미국 내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개인 은행업자가 되었다. 미국의 소규모 경제를 산업적 규모로 재편한 사람이 존 D. 록펠러와 앤드루 카네기라면, 그러한 변신을 가능하게 한 사람은 모건이었다는 것이 사람들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보기에도 위압적인 붉은 주먹코와 우렁찬 목소리를 지녔던 그는 뉴욕 증권거래소에 인접한 널찍한 집무실이나 뉴욕 앞바다를 순항하는 300피트 길이의 요트 ‘코세어 호’에 앉아서 세상을 주물렀다. 개인적으로 그는 낭비벽이 심한 편이었지만, 고객과 친구들을 고를 때는 부나 권력보다 인격과 성실성을 더 높이 평가하는 안목을 지녔다.

▲ 1929년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으로 실직한 사람들이 죽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사람들은 J.P.모건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모건은 몇 차례에 걸쳐 심각한 판단 착오를 저질렀다. ‘머캔타일 머린 해운 카르텔’을 구성하여 결국 실패로 끝난 일이나, 자동차의 부상을 간과한 것-그 결과 그의 철도 사업은 쇠퇴로 이어졌다-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회사는 여전히 번영을 계속했고, 경제 위기를 막아내는 데도 힘을 보탰다. 예를 들면 1907년의 증시 공황 때 모건은 뉴욕의 은행가들을 설득해서 구조 자금을 모았고, 그 결과 전체적인 재정 파탄을 막을 수 있었다. 이 일을 지켜본 연방 정부는 앞으로 이러한 개인적 중재를 피하려면 중앙 은행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에 따라 1913년에 연방 준비법이 통과되었다. 그 해에 J.P. 모건은 로마에서 사망했다.

J.P. 모건의 아들로 흔히 잭 모건이라 불리는 J.P. 모건 2세는 1892년부터 회사 일에 참여했고, 얼마 안 가 총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그 후 30년 동안 거의 일관된 패턴으로 모건 사를 이끌며, 번영과 불황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타고 넘는 경제적 혼돈 시기를 견뎌냈다. 이 시기에 모건 사는 프랑스와 영국 정부의 재정 대리인이 되어서 미국 기업들이 생산하는 수십억 달러 어치의 군수 용품과 기타 물자를 수입해 주었고, 전쟁 종식 후에는 국가 재건에 필요한 재정 비용을 상당 부분 제공했다. 아버지만한 권위를 지닌 대 금융업자는 아니었지만, 잭 모건 또한 당대에 으뜸가는 은행업자가 되었다.

1929년에 미국 증시가 붕괴하자-미국 내에 1,300만 명의 실업자를 낳고 수천 개의 투자 회사를 도산시킨-, J.P. 모건 사는 이를 초래한 장본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었다. 그 결과 정부 규제가 새로운 수준으로 올라섰고, 이는 경제계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조치는 글래스 스티걸 법령이라고 불리는 1933년의 은행법이었다. 이 법령이 통과됨에 따라 모건 사를 비롯한 많은 회사가 은행업과 증권업을 분리시켜야 했다. 이와 더불어 잭의 아들 해리는 스무 명 남짓한 직원을 이끌고 회사를 떠나 모건 스탠리 투자 은행을 세웠다. 시중 은행 기능만을 갖게 된 J.P. 모건 사는 1945년에 기업을 공개했다.

다음 해에 잭 모건이 플로리다 주 보가 그랜데에서 죽자, 토머스 라몬트라는 이름의 동업자가 회장이 되었다. 이로써 모건 사의 한 시대는 완전히 저물고, 거의 100년 만에 처음으로 모건 가 출신이 아닌 사람이 모건 사의 대표가 되었다.

업계에서 좀 더 확고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모건 사는 1959년 다른 대규모 시중 은행과 합병했다. 1960년대에는 상대적으로 규제가 덜한 유럽의 주식들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한편 이들은 미국에서도 이 사업을 재개할 꿈을 버리지 않았다.

모건 사가 채권 발행을 통해 멕시코 정부의 부채 구조를 양성화시키는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나서 1년이 지났을 때, 이들의 오랜 소망은 마침내 실현되었다. (모건 사는 이 멕시코 프로그램을 러시아 등 여러 발전 도상국을 돕는 데도 활용했다.) 연방 준비 위원회가 기존의 규제를 풀고 1989년에 모건 사에게 기업 인수 시장 재진입을 허용한 것이다. 이들은 열정적으로 사업을 재개했고, 모건 사의 주가는 미국 내 은행 가운데 최고액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에는 알맹이가 빠져 있었다.

1990년대에 모건 사는 미국 내 증권 업무를 활성화시키고, 아메리칸 센추리 상호 기금의 45퍼센트 지분을 매입했다. 이에 따라 순수입은 증가했지만, 모건 사의 위치는 수익성 있는 최초 주식 공모나 기타 영리성 거래를 인수하는 금융 기관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중간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 모건 사는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투자 전문가들을 고용해서 전기 통신, 첨단 기술, 인터넷 기업들에 힘을 집중하고, 랩모건(LabMorgan)이라는 부서를 만들어서 전자 상거래 서비스 개발에 나섰다. 또한 전통적 고객 기반이던 부유층 이외에 서민층을 대상으로 한 상품들도 개발했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숨가쁘게 변모한 업계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2000년 9월, 모건 사는 310억 달러 인수 계약을 체결해서 체이스 맨해튼 사에 회사를 넘겼다. 1799년에 세워진 체이스 사는 세계적인 거대 은행으로 거듭나기 위해 정력적으로 인수 합병을 추진해가던 중이었다. 모건 사와 하나가 됨으로써 체이스는 업계 2위의 기업이 되었다.

애초의 모건 가는 이제 공식적으로 깃발을 내렸다. 하지만 모건사를 인수한 회사는 이름을 ‘J.P. 모건 체이스’로 바꿈으로써, 그들이 이어받은 유산에 대한 긍지를 선명하게 내보이고 있다.

by 100명 2007. 4. 25. 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