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14)
J.P.모건 (J.P. Morgan) (상)




회사 개요
창업자: J. 피어폰트 모건
특징: 미국 금융 시스템을 보전하고 확장함
주요 제품: 시중 은행 업무 및 투자 서비스
연간 매출: 181억 1,000만 달러
종업원 수: 1만 5,512명
주요 경쟁사: 도이체 방크, 골드먼 삭스, 메릴 린치
회장 겸 CEO: 더글라스 A. 워너 3세(샌디 워너)
본사: 뉴욕 주 뉴욕 시
창업 연도 : 1854년
웹사이트: www.jpmorgan.com

전설의 모건 가가 금융계의 파워 집단으로 떠오른 것은 19세기 중반이었다. 이들은 U.S. 철강이라든가 제너럴 일렉트릭 같은 기업계의 큰 별을 키워내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한때는 미국 철도의 상당 부분들에 수백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으며, 미국 통화 체계가 여러 번 붕괴 위기에 처했을 때도 이를 회복시켰다. 이들은 대공황과 양차 대전의 참화도 버티어냈으며, 연방 규제 당국이 이들에게서 수익성이 가장 높은 사업을 떼어냈을 때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비즈니스 세계에서 이토록 막대한 역할을 담당하는 핵심 주자라는 사실로도 최근에 기업계에 불어닥친 거대한 변화의 바람만큼은 이겨낼 수 없었다.

▲ J.P.모건의 최초 설립자 조지 피바디(왼쪽)는 주니어스 스펜서(오른쪽)과 동업으로 시작했다. 주니어스는 뒤에 회사를 인수해 J.S. 모건으로 바꾸었고, 피바디는 대학을 세워 미국 굴지의 음악학교로 성장시켰다.
1830년대에 런던에서 문을 연 한 머천트 뱅크(merchant bank, 증권 업무와 어음 인수 등을 주 업무로 하는 영국의 은행 형태: 역자주)를 모태로 해서 태어난 J.P. 모건 사는 모건 가 3대의 손을 거치며 자라나는 동안 이미 오래 전부터 고만고만한 금융 기관의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이들은 월 가에 있는 본사뿐 아니라 세계 30여 개국에 자리잡은 지역 사무실을 통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저명 인사들과 권력자들에게 재무 상담 역할을 했다. 이들은 몇 차례에 걸쳐 최대 규모의 공모 주식들을 인수했으며, 역시 최대 규모의 기업 합병들을 주도했다. 게다가 한때 이들은 미국 정부의 제 1 자금 조달 원천으로도 활약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건 가 하면 자동적으로 현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른 금융업자 집단으로 인식했다.

그렇다고 모건 가 사람들의 평판이 언제나 좋았던 것은 아니다. 탐욕과 책략에 관한 한 어느 한 쪽도 부족하지 않았던 이들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을 희생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많은 미국인들이 최저 생활 수준에서 허덕이던 시절, 이들은 별다른 죄의식 없이 대중 앞에서 엄청난 부를 과시했다. 아름다운 여인과 값비싼 시가, 거대한 요트, 세계 수준의 미술 작품에 대한 이들의 애호는 유명한 이야기다. 이들은 미국의 경제계가 자신들의 놀이터인 양 행동함으로써, 종국에는 스스로 도움을 베푼 미국 정부나 개인들에게서조차 지지를 잃는 결과를 빚었다.

J.P. 모건 사는 지난 50년 간 태도며 사업 방식이 크게 달라졌지만, 금융 시장의 변화는 그보다 더 속도가 빨랐다. 그 결과 이들은 2000년 가을, 다른 금융 회사에 인수된다는 사실을 발표해야 했다. 이들을 인수한 회사는 명성과 영향력 면에서는 이들보다 떨어졌지만, 그 뿌리만큼은 모건 사보다도 훨씬 깊은 곳에 자리잡은 곳이었다.

▲ J.P.모건은 맥킴하우스를 사들여 당시로선 거금인 120만불을 들여 도서관과 박물관으로 꾸몄다. 고미술품 수집가인 그는 메트로폴리탄 등 미국 유수한 박물관에 많은 유물을 기증했고 하버드대학 등 여러 대학에 도서관을 많이 지어 사회의 악평을 무마하려 애썼다.
1838년에 미국의 사업가 조지 피바디는 런던에 한 머천트 뱅크를 열었다. 몇 년 후 그는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을 동업자로 맞아들였다. 뉴잉글랜드의 유력한 사업가 집안 출신인 모건은 1854년에 회사를 넘겨받고, 이름을 J.S. 모건 사로 바꾸었다. 그 뒤 모건은 30년도 넘게 회사를 경영하면서 영국과 미국 사이의 중요한 재정적 연결고리 역할을 했고,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 때는 프랑스 정부에 5,00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앞날에 이들이 펼칠 국제적인 역할을 예고했다.

유럽으로 떠나기 전에 모건은 아들을 얻었다. 어린 J. 피어폰트 모건은 보스턴, 스위스, 독일을 거치며 학업을 마친 뒤 뉴욕으로 돌아와, 아버지 회사의 대리 법인에서 회계원으로 근무했다. 1860년대와 70년대에는 몇 건의 투자에도 관여했는데, 파리의 드렉셀 하제스 회사도 그 대상 중 하나였다. 1890년에 아버지 모건이 죽자 사업을 물려받은 아들 모건은 회사 이름을 J.P. 모건 사로 바꾸고 유럽과 미국에 나뉘어 있던 지분을 통합했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는 금융계에 큼직한 발자국을 하나 찍었다. 미 연방 정부가 고갈된 금 준비를 충당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을 대량 구매함으로써, 정부의 재정난을 경감시켜 준 것이다.

본사를 뉴욕으로 옮긴 뒤, J.P. 모건은 미국 경제계를 키우는 데 힘을 집중했다. 첫 무대는 철도 사업이었다. 모건은 2대 경쟁사-뉴욕 센트럴 철도와 펜실베이니아 철도-사이에 요금 협정을 이끌어내고, 서던, 이리, 노던 퍼시픽 등 다른 철도 회사들을 재조직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덕분에 그는 여러 철도 회사의 주식을 받았고 이사회에도 소속되었는데, 그 결과 그의 부와 영향력은 막대하게 팽창했다. 1902년에 이르자 미국 전체 철도 가운데 1/6이 그의 통제 하에 있었다.

by 100명 2007. 4. 25. 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