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가족…홍콩, 정체성 위기?

[쿠키 지구촌] 딸은 호주, 아들은 중국 상하이에 머무는 동안 남편은 캐나다에서 휴가를 보내고 아내는 홍콩의 집을 지킨다. 가족 구성원들이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살되 고향 홍콩을 거점으로 유대를 유지하고, 국제적 감각과 영어 실력을 갖추되 중국 문화를 잊지 않는 것. 전형적인 홍콩 중산층의 모습이다.

영국 점령 100년을 마감하고 1997년 중국에 반환된 홍콩 특별행정구 시민들에게는 그간 코스모폴리탄(세계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다문화를 인정하는 포용적인 분위기 덕분에 얻은 별명이다.

하지만 최근 중국 티베트 사태와 쓰촨성 대지진을 계기로 중화 애국주의가 과열되면서 ‘코스모폴리탄의 고향’ 홍콩이 정체성 위기에 빠졌다고 BBC방송이 25일 보도했다. 이중국적을 가진 공직자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시민들 사이에서는 소지 여권의 숫자가 애국심의 척도처럼 여겨지고 있다.

지난달 홍콩을 떠들썩하게 한 차관급 부국장과 정치조리(助理)를 둘러싼 이중국적 스캔들은 대표적 사례. 경제발전국 부국장에 발탁된 그렉 소 변호사를 포함해 부국장 8명 중 5명과 정치조리 9명 중 4명이 해외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가진 것으로 드러나면서 사회적 비난이 고조됐다. 당초 “홍콩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상 이중국적은 불법이 아니다”며 버티던 당사자들은 ‘기회주의자’라는 여론에 밀려 결국 상당수가 타국 국적을 포기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수십만 명의 홍콩인들이 두 개 이상의 여권을 소지한 이중국적자라는 점이다. 중국 반환에 불안감을 느낀 홍콩 중산층 가정에서는 가족 구성원 한두 명이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영국 등에 나가 영주권을 취득하는 게 유행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다시 홍콩으로 돌아왔지만 취득한 여권은 일종의 ‘보험’으로 장롱 깊이 보관해뒀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이중국적자에 관대하던 사회 분위기는 최근 애국주의 열풍으로 급변했다. 변화는 지난 3월 티베트 독립시위 유혈진압 후 전세계적으로 베이징올림픽 반대 여론이 높아지면서 감지됐다. 성화 봉송이 미국 유럽에서 친티베트 시위대에 의해 방해받자 홍콩에서는 반서방 분위기가 팽배해졌고 지난 5월2일 홍콩 성화 봉송식에서는 수천명이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를 몸에 두르고 친중국 시위를 벌였다. 쓰촨성 대지진 후에도 “동포를 돕자”는 기부 애국주의가 홍콩 전역을 휩쓸었다.

한편에서는 애국주의가 홍콩의 정체성을 위협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BBC는 “홍콩을 홍콩답게 하는 세계주의가 애국주의에 눌리고 있다”며 “일부 시민 사이에서는 정체성을 잃으면 자치권의 근거마저 사라진다는 위기의식이 퍼지고 있다”고 전했다.

by 100명 2008. 6. 26. 0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