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그리스 크레타섬
[세계일보 2004-07-22 16:33]
‘따사로운 가을날, 낯익은 섬의 이름을 외며 에게해를 헤쳐나가는 것만큼 사람의 마음을 현실에서 꿈의 세계로 옮겨 가게 하는 것은 없으리라.’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소설에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 수많은 신화를 간직한 에게해의 섬들은 현실 너머에서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섬인 크레타는 5000여년 전의 위대한 문명과 신화를 담은 꿈 속의 세계다.

기원 전 3000년쯤 태동해서 기원 전 1400년까지 번성한 크레타 문명은 오리엔트 문명과 이집트 문명을 그리스에 전달하는 교량 역할을 했다.

이 문명은 아케아인의 침입으로 급격하게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 본토 남부의 미케네 지방에서 번성한 아케아인은 기원 전 13세기 무렵 트로이로 원정했다. 그 아케아인도 기원 전 12세기 북방에서 침입한 도리아인에게 멸망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크라테스 등의 철학자는 그로부터 몇 백년 후의 인물들이다.

크레타 문명은 전기 에게 문명으로 불린다. 당초 신화로 여겨지다 고고학 분야의 발굴 성과에 의해 역사로 편입된다.

북쪽의 해안 도시 이라클리온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그 신화와 역사의 현장이 있다. 대표적인 곳은 크노소스궁으로 통로가 복잡해 미궁으로도 알려졌다. 재미있는 신화 한토막도 전해진다.

이곳을 다스리던 왕 미노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도움으로 왕이 되었으나 황소를 제물로 바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그러자 포세이돈은 저주를 내리고 미노스 왕의 아내 파시파에는 황소와 사랑에 빠진다. 결국 왕비는 소의 머리를 단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낳게 되고 왕은 이 괴물을 미궁에 가둔다. 그리고 정복한 아테네 사람들에게 괴물의 먹이로 9년마다 7명의 처녀와 7명의 청년을 요구했다. 이에 분노한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스스로 희생자가 되어 미궁에 숨어 들어간 뒤 괴물을 죽이고 희생자들을 구출한다는 신화다.

크노소스 궁은 현재 폐허로 남아 있지만 원래 약 1500개가 넘는 방이 있었다. 수많은 방들에는 환기와 채광시설, 상·하수도, 욕조가 딸린 욕실, 수세식 화장실, 전망 좋은 베란다, 방을 서늘하게 하는 물 저장 탱크 등이 있어서 발굴하던 20세기 초의 유럽인들을 감탄시켰다고 한다. 자신들에게 없는 것을 3500여년 전의 크레타인들이 누렸으니 말이다. 궁 입구의 벽에 그려진 백합관을 쓴 날씬한 왕자와 여인들, 여왕의 방에 그려진 파란 색깔의 돌고래 프레스코 벽화를 통해 그들의 미적 감각과 활기찬 해양 문명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도 있다.

사실 처음 발견되었을 때 유물들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현장을 복원시키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영국 고고학자 에번스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에번스는 이로 인해 유적건설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어쨌든 관광객들은 그의 덕택에 수천년 전의 문화적 분위기를 흠뻑 맛볼 수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이라클리온의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뿔 모양의 술잔과 신화에 바탕한 그림, 물고기 문어 등이 그려진 아름다운 도자기들, 가슴을 드러낸 채 뱀을 들고 있는 상아로 만든 ‘뱀의 여신상’ 등은 크레타 문명의 화려함과 섬세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같은 고고학적 유물만 크레타의 매력은 아니다. 연평균 기온이 19도인 크레타 섬에는 올리브와 포도, 건포도, 감귤류, 바나나, 아몬드 등의 과일이 풍성하고 전통 음식점인 타베르나에서 올리브유가 섞인 그리스 전통 음식을 마음껏 즐길 수가 있다.

또한 크레타섬 어딜 가나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음악이 흘러 나온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향이 바로 크레타였다. 이 위대한 작가는 현재 이라클리온 남서쪽 언덕에 누워서 파란 에게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묘비는 그의 작품 만큼이나 감동적이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

그 말을 하기까지 그의 삶이 얼마나 큰 고뇌와 치열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던가를 생각하면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여행작가

■ 작가는 …

이지상씨는 1988년부터 지금까지 17년째 국내외로 떠돌며 이색 문화·종교·역사 자료를 수집해 온 40대 중반의 여행작가다. ‘황금소로에서 길을 잃다’(북하우스) ‘나는 늘 아프리카가 그립다’(디자인하우스) 등의 저서를 냈고, EBS 라디오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에 고정 출연해 해외여행을 소개하고 있다.

〈약력〉 ▲서강대 정외과 졸업 ▲3년간 평범한 회사원 생활 ▲88년부터 방랑 시작

■ 여행정보

크노소스 궁을 보려면 크레타 북쪽 해안가의 중심 도시 이라클리온으로 가야만 한다. 아테네에서 비행기로 갈 수 있고, 배로는 약 12시간 정도 소요된다.

방문하기 가장 좋은 때는 맑은 날씨가 많은 봄가을이지만 바닷가에서 선탠을 즐길 수 있는 무더운 여름에도 많이 간다.

by 100명 2007. 4. 13. 2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