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그리스 델포이
[세계일보 2004-08-12 16:15]

고대 그리스 문화가 아테네에서 꽃을 피웠고 올림픽이 올림피아에서 싹을 틔웠다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세상의 중심은 델포이였다.

세상의 중심으로 가는 길은 산길을 따라 돌고 돌았다. 아테네에서 떠난 버스가 굽이치는 산길을 3시간 정도 가자 거대한 파르나소스산이 나타났다. 버스에서 내려 산으로 올라가니 델포이 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돌기가 돋은 종 모양의 돌, 옴팔로스였다.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신이 독수리 2마리를 놓아주면서 세계의 중심을 향해 날아가게 했더니 독수리들은 델포이에서 만났다. 그 지점을 돌로 표시한 후 그 돌을 지구의 중심을 의미하는 대지의 배꼽, 즉 옴팔로스(Omphalos)라 불렀다고 한다.

박물관에는 그 외에도 아폴론 신전의 축소 모형과 신전에 바쳐진 보물들, 이륜전차를 모는 사람의 청동상, 낙소스인들이 봉헌한 스핑크스상 등이 있었다.

여자의 얼굴에 사자의 몸뚱이,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이 스핑크스는 ‘아침에는 발이 4개, 낮에는 2개, 저녁에는 3개 달린 것이 무엇이냐’는 수수께끼를 내어 ‘사람’이라는 답을 못 내놓으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전설의 괴물이다.

박물관을 나와 10분 정도 참배의 길을 걸어 올라가면 아폴론 신전이 나온다. 기원전 6세기에 처음 만들어졌고, 두 차례 파괴된 후 기원전 4세기에 다시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몇 개의 기둥과 터만 남아 있다.

아폴론 신전이 유명한 것은 델포이의 신탁 때문이었다. 델포이의 신탁소는 원래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인 뱀, 퓌톤이 지켰는데 제우스의 아들인 아폴론이 퓌톤을 죽이고 그곳을 차지했다. 또다른 신화에 의하면 아폴론이 죽인 것은 뱀이 아니라 델퓌네, 즉 ‘자궁과 같은 것’이라는 이름의 암룡이었는데 그로부터 델포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도 한다.

아폴론의 신전에는 신탁소가 있었다. 벌어진 바위 틈에서 나오는 증기(메탄가스로 추정)를 마시고 환각 상태에서 무녀가 중얼거리면 그것을 사제가 해석해주었는데, 현재는 바위 틈에서 그런 가스가 나오지는 않는다.

이곳에서 신탁을 받은 사람은 많았다. 소아시아에 있던 리디아 왕국을 다스리던 기원전 6세기의 크로이소스왕은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를 공격하면 대제국이 파괴될 것’이라는 델포이 신탁을 믿고 공격했으나 자신이 오히려 나라를 잃었다. 그것을 나중에 항의하자 “그 대제국이 누구의 것인가를 묻지 않은 당신이 현명하지 않았다”는 황당한 답을 듣기도 한다.

소크라테스에 관한 신탁도 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가 “그리스에서 가장 현명한 자가 소크라테스냐”고 묻자 “그렇다”는 답을 듣는다. 이를 스스로 의심한 소크라테스는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을 찾아다니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었다.

◇상아로 만든 여자상

사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그 이전의 현인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아폴론 신전에도 새겨져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도 신탁을 받았다. 테베의 왕자였던 그는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코린토스에서 살게 된다. 그러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는 신탁을 듣고 괴로워하다, 그것을 피하고자 집을 떠난다. 그러나 길을 가다 만난 친아버지를 모르는 채 죽이고, 괴물 스핑크스를 처치한 공으로 테베의 왕비, 즉 자신의 친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 후일 이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도려낸 후 참회의 길을 떠나게 되니 델포이의 신탁은 그렇게 실현된 것이다.

고즈넉한 신전의 폐허에 앉아 이런 신화와 역사를 더듬다보면 문득 먼 옛날 신화의 현장에 온 것만 같은 묘한 느낌이 들고만다.

근처에는 집회장소이자 시장이었던 아고라의 터가 있고, 5000여명의 관중을 수용한 원형극장, 트랙의 길이가 200m쯤 되는 경기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음악 축제와 육상제전이 결합된 델포이 제전이 열리기도 했었다.

이렇듯, 기원전 8∼6세기에 그리스의 종교적 중심지였던 델포이는 후일 기독교 중심의 사회가 되면서 의미를 상실했고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1892년 프랑스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면서 지금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여행작가

■ 여행정보

델포이는 아테네에서 약 170km 떨어진 곳에 있어서 당일치기 관광이 가능하다. 아테네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루에 4∼5편 왕복하는 정기버스를 타고 개인적으로 갈 수도 있고 당일치기 혹은 이틀짜리 관광상품을 이용할 수도 있어 매우 편리하다. 주변에는 호텔과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분위기 좋은 식당들도 많다.

■ 에피소드

그리스 사람들은 생각보다 차고 거친 것 같다. 하루는 아테네의 같은 숙소에 묵던 호주 여행자가 거리에 앉아 공업용 본드 위에 들러붙은 배낭을 떼어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체크 아웃을 한 후 배낭을 거리에 두고 잠시 호텔로 들어온 사이에 누군가가 골탕 먹이려고 배낭 밑을 본드 범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호주 청년은 전날에도 그리스인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었는데, “이것 보았지요. 이러니, 내가 그런 말 안 해요?”라며 투덜거렸다.

델포이에 간 나에게도 불쾌한 일이 발생했다. 버스에서 내려 아폴론 신전 가는 길을 중년 사내에게 물어보니 기분 나쁘게 위아래를 훑어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박물관 근처에서 직원에게 매표소 위치를 물었을 때도 직원은 인상을 쓰며 가르쳐준 뒤 뭐라 중얼거리며 화를 냈다.

물론 이런 한두 가지 에피소드로 그리스 민족성을 들먹거리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관광객이 엄청나게 몰려오다 보니까 외국인에 대한 신경과민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리스인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번 아테네 올림픽이 그들에게 세련미를 부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by 100명 2007. 4. 13. 2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