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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터키 트로이 | ||||
[세계일보 2004-10-07 16:18] | ||||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기원전 13세기의 지중해안은 비상시국이었다. 인구는 생산력에 비해 과잉이었고 가뭄과 기근이 휩쓸었다. 재물을 약탈하고 노예와 여자를 탈취하는 것이 관행이었던 이 시절, 정세는 극도로 불안했다. 그 당시 강대국은 이집트와 히타이트였다. 이집트의 왕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와 큰 전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히타이트 왕국은 현재 터키의 중부 지방에 있었다. 이런 가운데 그리스 본토 남부에 근거지를 둔 미케네 문명이 새롭게 떠올랐고, 아케아인으로 일컬어지는 그들은 시장 확대와 무역을 위해 주변의 섬과 나라들을 공격했다. 해상세력인 미케네 문명과 대륙 세력인 히타이트 문명의 접경에 있던 트로이는 전통적으로 히타이트 왕국과 동맹 관계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를 쳤을 때 히타이트는 트로이에 동맹군을 보냈는데, 그 바람에 전쟁이 10년이나 걸렸다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렇듯 트로이 전쟁은 해상무역의 주도권 쟁탈전이었으나,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에 의해 신과 여인이 어우러진 찬란한 문학으로 재탄생했다. 그가 쓴 대서사시 일리아드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를 납치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그러자 메넬라오스의 형인 미케네왕 아가멤논이 그리스 연합군을 형성해 트로이로 원정을 떠났고,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 10년째 되는 해의 기록이다. 트로이의 자취로 추정되는 유적은 터키 서북부 지역의 에게해 인근에 있다. 우선 차나칼레란 도시로 간 후, 그곳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40분 정도 벌판을 달리면 트로이 유적지가 나온다. 트로이 유적지 입구에는 상상력을 동원해 만든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가 세워져 있고 목마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트로이 성터가 있다. 부푼 기대감을 안고 간 사람들은 갑자기 펼쳐지는 폐허 같은 풍경에 실망감을 금치 못하게 된다. 원래 가로 200m, 세로 150m 정도라는 성벽은 사라지고, 호메로스가 묘사한 ‘높은 탑, 거대한 성벽’ 등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기원전 1900년에서 1240년 사이에 건설된 여섯 번째의 도시가 트로이 전쟁 당시의 성터로 추정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페르시아 왕과 알렉산더 대왕, 카이사르,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등이 이곳을 방문했다는데 언덕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면 아가멤논, 아킬레우스, 파리스, 헥토르 등의 영웅들이 싸웠다는 드넓은 평원이 해안과 함께 보인다. 발길을 돌려 서쪽 문 근방으로 오면 허물어진 성벽을 급하게 막은 흔적이 보인다. 다른 곳처럼 돌이 반듯하지 않고 이쪽저쪽에서 모은 볼품없는 돌이어서 아마도 트로이 목마를 안으로 들여온 후 급하게 막은 것이 아닐지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 오면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였던 남문이 나온다.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친척의 복수를 위해 트로이의 장군 헥토르를 죽인 후 시신을 마차에 매달고 울분을 토했던 바로 그 장소다. 그러나 현재 성문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폭이 10m 정도고 흩어진 돌무더기가 쌓여 있을 뿐이다. 트로이 유적지에서는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거리감을 느끼며 실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추악한 전쟁을 낭만적 대서사시로 승화시킨 시인의 무한한 상상력에 대해 감탄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삶의 토대인 현실은 중요하지만 만약 현실에만 집착해서 세상을 본다면, 인간의 역사는 얼마나 비참하고 삭막할 것인가. 호메로스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인간에게 꿈을 주었고, 그 꿈은 21세기 초에 와서 ‘트로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엄청난 부를 창출하기도 했다. 현실 속에서 꿈이 만들어지고, 그 꿈을 토대로 다시 새로운 현실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것이 우리의 꿈 같은 현실일지도 모른다. 여행작가 ■유적 발굴 뒷 얘기 1870년에서 1873년 사이, 트로이를 발굴했던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은 자신의 꿈을 실현한 사람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영국의 BBC 다큐멘터리 작가 마이클 우드가 쓴 책을 보니 다른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슐리만은 허풍과 과장이 심했고 사기도 쳤으며, 심지어 자신조차 속였다고 한다. 그가 어린 시절 트로이를 발굴하겠다고 맹세했다는 얘기는 자신의 발굴 성과를 좀더 극적으로 포장하기 위해 소급해서 만든 그 자신의 ‘창작품’이고, 그가 발굴한 유물조차 자신의 목적에 맞추려고 조작했다는 비판론이 끊임없이 대두됐다. 그는 실제로 생전에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협잡꾼, 사기꾼이란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기꾼으로 지목하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 일이다. 트로이 문명을 발굴하는 데 슐리만의 집념은 큰 역할을 했고 그의 전 재산을 털어 넣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년은 행복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나폴리의 어느 거리를 걷다 발작을 일으켜 죽었는데 당시 무일푼이었다고 한다. 과연 슐리만은 말년에 자신의 업적에 대해 행복해했을까, 아니면 허망함을 느꼈을까 ■여행정보 트로이 주변에는 숙소가 없고 근처 도시 차나칼레에 저렴한 숙소부터 고급 호텔까지 많이 있다. 트로이까지는 차나칼레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개인적으로 가도 좋고, 여행사의 투어에 참가해도 된다. 투어비는 15∼20달러다. 이스탄불에서 여행사의 투어에 참가해도 되는데 교통비와 식비까지 포함해 30∼40달러 든다. 이 투어에서는 트로이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갈리폴리 전적지를 돌아보는데, 전적지는 당시 독일군과 동맹을 맺은 터키군이 영국과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차나칼레는 이스탄불에서 버스로 5시간 정도 걸리는데 페리를 이용해 바다를 건너는 30분 코스도 포함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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