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오스트리아 빈
[세계일보 2004-11-11 16:36]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한때 세상의 중심이었다. 16세기 초 오스트리아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로마 황제가 된 후 결혼 정책을 통해 영토를 헝가리와 스페인까지 넓혔다. 그 후 1차 세계대전 때 제국은 해체되었고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영세 중립국이 되었지만, 빈에는 전성기의 영광을 보여주는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구시가지의 한가운데 둥글게 원을 그린 도로, 즉 링크 안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이 우뚝 솟아 있고 주변에는 왕궁, 국회의사당, 오페라하우스, 수많은 박물관·미술관들이 있다. 그리고 파란 잔디와 숲이 어우러진 시립공원, 케른트너 보행자 거리, 외곽의 낭만적인 도나우강과 교외의 화려한 쇤브룬 궁전을 보려는 관광객들의 발길로 빈은 언제나 북적거린다.

그러나 빈의 진정한 매력은 화려한 건축물 사이에 배어 있는 예술가들의 흔적에서 찾을 수 있다. 음악 도시 빈의 황금기는 18∼19세기였다. 수많은 음악가가 빈으로 모여들었고, 지금도 거리 곳곳에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등의 동상과 그들의 흔적이 서린 박물관들이 늘어서 있다.

모차르트의 흔적은 우선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찾을 수 있다. 뾰족한 첨탑의 높이가 139m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다는 대성당에서 213년 전 모차르트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나왔지만, 장례식을 치른 후 비가 오는 바람에 그의 시신은 자루에 담겨 공동묘지의 구덩이에 내던져졌다. 후일 인부들이 매장하려 했지만 시신을 찾지 못해 현재 그의 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새처럼 훌쩍 날아간 천재 모차르트의 나이는 당시 36세였다.

시내 중심지에는 베토벤 하우스가 있다. 고풍스러운 건물의 좁은 계단을 오르면 4층에 한때 베토벤이 머물렀던 방이 있다. 그 방에는 베토벤이 쓰던 피아노와 편지,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고 그가 이곳에서 작곡한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헤드폰까지 설치되어 있다. 그는 이곳에서 교향곡 4, 5, 7, 8번을 작곡했다고 한다. 헤드폰을 쓰고 누구나 한번쯤은 학창 시절에 좋아했던 5번 교향곡 ‘운명’을 듣는다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베토벤 하우스에 보존된 피아노.

◇관광객을 태우고 달리는 마차.

빈의 근교 하일리겐슈타트에는 베토벤이 유서를 썼던 집도 있다. 뜰이 있고 큰 나무가 하늘 높이 뻗어오른 집 2층에는 베토벤의 두상과 악보들, 그리고 1802년 10월 6일자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그가 쓴 유서다.

“나는 고독하다. 참으로 고독하다…. 내 옆의 사람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고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든가, 또 그 사람들은 양치는 목자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는데 내게는 여전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적에, 그 굴욕감은 어떠하였으랴. 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었다…. 죽음이여, 오고 싶은 때에 언제든지 오라. 나는 너를 맞으리라. 그러면 잘들 있거라….”

그는 유서를 쓴 후에도 25년이나 더 살며 합창교향곡 등 불후의 명곡들을 작곡했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전원교향곡을 작곡했다는 집도 여전히 보존되어 있다.

한때 빈에서 활동했던 수많은 음악가는 죽어서 한데 모였다. 빈의 교외로 가면 중앙묘지가 있는데 입구에서 대로를 따라가다 왼쪽으로 가면 32A 블록이 있다. 그곳이 바로 음악가 묘역이다.

중앙에 여인이 악보를 들고 서 있는 동상은 모차르트의 기념비고, 그 뒤 왼편에 베토벤의 묘가 있다. 베토벤은 58년간 이 세상에 머물다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천지를 울리던 어느 날 밤 세상을 떴다. 그때 그의 눈을 감겨준 것은 아무 인연도 없는 사람의 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베토벤의 묘 옆에는 서른두 살이란 이른 나이에 죽으며 베토벤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던 슈베르트의 묘가 있다. 그 외에도 주변에는 브람스와 요한 슈트라우스 등 유명한 음악가들의 묘가 있어 그곳을 거니노라면 고요한 정적 속에서 귓가에 아름다운 선율들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이런 순간들이야말로 빈 여행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매력이 아닐까?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동양인들에 불친절

달라진 인심에 당혹

1992년 빈에 처음 갔을 때, 여행자를 배려해주는 인심에 감사했다. 그러나 2002년 다시 갔을 때 달라진 풍경에 당혹스러웠다.

빈의 남부 기차역 안내창구에서 교통편을 물어볼 때였다. 앞에서 웬 서양인이 물어볼 때까지 친절하게 대답해주던 남자 안내원은 내 차례가 되자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인사를 해도 쌀쌀맞게 대하고 몇 가지 질문을 해도 시큰둥하게 대답했는데, 거의 경멸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어 더 큰 문제였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이 없었다. 가만히 관찰해보니 내 옆의 다른 줄에 있던 한국 여자도 그런 대접을 받고 있었고, 다른 역의 안내창구에서도 유독 일본인이나 한국인 등 동양인들에게는 매우 노골적으로 불친절하고 깔보는 표정들을 내비치고 있었다.

물론 친절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1992년에는 볼 수 없었던 살벌한 풍경이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낯선 곳에 와서 언어와 관습에 서투른 동양인들이 실수를 한 탓에 나쁜 편견을 가졌을 수도 있고,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심하다는 외국인 혐오증(특히 동양인·아랍인들에 대한)이 전 유럽에 퍼지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나뿐 아니라 많은 한국인이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 씁쓸하기만 했다.

동시에 그런 사건은 한국에 와서 일하는 동남아, 서남아인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바르게 대했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여행정보

빈의 오페라 극장은 좌석에 앉아 보려면 정장을 해야 한다. 그러나 복장이 자유로운 여행자들도 입장할 수 있는 입석표를 판다. 요금은 3.5유로(약 5000원) 정도. 공연시간 약 2시간 전에 가면 입석표를 구할 수 있다. 운동화 차림은 괜찮지만 샌들은 문제가 된다. 오페라 감상은 음악의 도시 빈에서 놓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감동적인 기회다.

by 100명 2007. 4. 13. 1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