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겨울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세계일보 2004-11-25 16:06]

태평양에 부동항을 열고 모피 등을 조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베리아를 개척하던 러시아는 오랜 세월에 걸쳐 시베리아에 횡단철도를 건설했다. 1870년 우랄산맥 부근의 예카테린부르크까지 개통된 철도는 계속 동쪽으로 연장되어 98년 바이칼 호수의 이르쿠츠크까지 이어졌다. 또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 구간은 앞서 97년에 개통되었고, 마지막으로 스레텐스크∼하바로프스크 구간이 1916년에 개통되면서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횡단철도가 완성됐다.

이렇듯, 군사·경제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낭만적인 길이 되었다.

2000년 초겨울 어느 날 홀로 배낭을 메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달렸다. 총 길이 9446㎞로 두 번 왕복하면 지구 한 바퀴를 도는 것과 같은 먼길이었다. 6박7일이 걸리는 시간을 열차 안에서만 보낼 수 없었기에 중간 중간에 내려 도시를 구경했다.

아무르강변의 하바로프스크, 우리와 비슷한 외모의 부랴트족이 살고 있는 울란우데, 세계 최대의 호수 바이칼호, 시베리아의 파리라 일컬어지는 이르쿠츠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횡단철도에서 벗어나 버스를 타고 사얀 산맥을 돌고 돌아 시베리아 청동기 문화의 요람인 아바칸과 아시아 중심 기념비가 있는 투바 공화국의 수도 키질을 방문했다. 이어 횡단철도를 타고 시베리아에서 제일 큰 도시인 노보시비르스크와 우랄 산맥 부근에 있는 유럽의 관문인 예카테린부르크를 돌아보고 러시아의 자랑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마지막 도시 모스크바까지 가는 데 모두 한달 정도가 걸렸으며, 시간대가 여덟 번이나 바뀌는 매우 재미있는 길이었다.

11월이건만 시베리아 한복판은 이미 눈 속에 깊이 파묻혔고 수은주는 영하 25도로 곤두박질쳤다. 사실 추위보다도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낯선 세계를 홀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것이 더 어려웠다. 저렴한 호텔에서 숙박을 거절당하기도 했고 경찰 검문도 많이 당했으며, 모스크바를 떠나던 날 저녁에는 시비를 거는 스킨 헤드족과 빙판길 격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겨울 시베리아 횡단은 낭만적이었다. 특히 하바로프스크에서 울란우데까지 약 54시간에 걸쳐 거대한 타이가 숲을 달리는 동안 눈 덮인 침엽수림과 헐벗은 자작나무 숲의 풍경은 쉽게 끝나질 않았다.

하루종일 그 풍경을 바라보다 싫증날 때쯤이면 침대에 팔베개하고 드러누워 기차에서 흘러나오는 애절한 러시아 음악에 푹 젖어 들었다.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 소설에 나오는 나타샤, 라스콜리니코프 등 수많은 주인공들의 이름과 영화 닥터 지바고를 회상하기도 했다. 영화를 실제로 찍은 장소는 북유럽의 어느 국가였다지만 차창 밖 풍광은 영화 속 장면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또 공산주의 혁명 당시 적군과 백군의 싸움을 상상하기도 했고, 그 와중에 억울하게 죽어간 한국 독립군들의 애환에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보드카 파티를 열던 러시아인들.

가끔 술을 좋아하는 러시아 사람들과 어울려 보드카를 마시다 곯아떨어지기도 했고, 아리따운 러시아 여인들의 모습에 가슴 두근거리기도 했다.

멀고 먼 길을 가는 횡단열차 속에서는 짧은 삶이 펼쳐졌다. 아침이면 화장실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섰고, 때가 되면 식당이나 열차 칸에서 끼니를 해결하느라 바빴다. 기차가 정차할 때 잠시 열리는 역사 간이장터에서 승객들은 소시지와 빵 등의 식료품과 맥주 보드카 등을 샀다. 내가 늘 고마워했던 음식은 한국산 ‘도시락라면’과 ‘초코파이’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어느 도시, 어느 역에서나 그것을 구할 수 있었으니 동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시베리아 횡단여행은 결코 어려운 길이 아니었다. 러시아 알파벳과 여행에 필요한 약간의 말을 익힌 후 좋은 가이드북을 갖고 떠난다면 짜릿한 감흥을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길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틈틈이 그 길을 소개할 예정이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이르쿠츠크에서 크라스노야르스크행 저녁 열차를 타니 내가 탄 칸에 러시아 중년 사내 3명이 먼저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저녁이 되자 술판을 벌이며 나에게도 술을 권했다. 레몬맛이 나는 보드카로 일반 보드카보다 약한 35도짜리였지만 목이 타는 것은 여전했다. 그들은 보드카를 벌컥 들이마신 후 타는 목을 달래기 위해 맥주를 마셨다. 안주 겸 저녁은 바이칼 호수에서 잡히는 ‘오물(omul)’이라는 생선과 소시지였다. 술이 별로 세지 않지만 정에 굶주렸던 나는 ‘삼수갑산에 가더라도 일단 마시고 보자’라는 생각에 주는 대로 벌컥벌컥 받아 마셨다. 그러자 러시아인들은 신이 나서 ‘카레야(코리아) 넘버 원!’을 외치며 계속 잔에 술을 부었다. 그 바람에 먼저 곯아떨어졌는데 다음날 아침,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아침도 먹지 않았는데 이들은 기차가 역에 도착하자 매점에서 커다란 보드카와 맥주 몇 병을 사갖고 오는 게 아닌가. 해장술이었다. ‘저걸 마시면 내가 죽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한국 남자의 체면을 위해 마시고 또 마셨다. 그날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 후 영하 15도의 길거리에서도 맥주병을 들고 다니는 러시아인들을 보았으니 정말 술을 좋아하는 민족임에 틀림없다.

■여행 정보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1등칸 2인실은 매우 비싸고 2등칸 4인실 쿠페는 비교적 저렴하다. 예전에는 외국인 가격과 내국인 가격이 달랐으나 지금은 모두 동일하다. 담요는 몇 백원 정도를 내고 빌려야 한다. 여름에는 기차표나 숙소를 구하기가 힘든 편이지만 겨울에는 얼마든지 있다.

기차표 시간은 모두 모스크바 시각 기준이므로 잘 계산해야 한다. 급행과 완행, 짝수날과 홀수날 등의 러시아말을 익히면 금방 파악할 수가 있다.

by 100명 2007. 4. 13. 1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