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하카스 아바칸
[세계일보 2004-12-30 15:54]

러시아 지도를 펼쳐 놓으면 몽골과 서부 시베리아 평원 사이에 높은 산맥들이 보인다. 약 2000㎞ 길이의 알타이산맥과 1000㎞의 서사얀산맥 그리고 600㎞의 동사얀산맥인데, 사얀산맥 사이를 흐르는 예니세이강은 러시아 대륙을 종단해 북쪽의 북극해로 흘러들어간다.

이 거대한 산맥과 강 유역은 예로부터 수많은 유목민들의 고향이었다. 돌궐족(투르크족)과 위구르족, 몽골족이 살았고 지금은 러시아 연방에 속한 알타이 공화국과 하카스, 투바 공화국 등이 있다.

그 중에서 하카스 공화국의 수도 아바칸 근처에 있는 미누신스크는 약 5000년 전부터 청동기 문화가 발생한 곳으로 시베리아 문화의 요람이었다.

이르쿠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서쪽으로 가다 크라스노야르스크라는 곳에서 내린 뒤 횡단철도 본궤도에서 벗어나 남쪽으로 들어가는 기차를 타면 거?12시간 후에 아바칸에 도착하게 된다.

밤기차를 타고 가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차창 밖으로 눈에 파묻힌 자작나무 숲과 침엽수림이 펼쳐지고 있었다. 눈 속에 푹 파묻힌 아바칸은 인구 16만명으로 작고 아담한 도시였다. 하카스라고 하지만 인구 약 60만명 중에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81.5%고 몽골계인 하카스인은 11.5% 정도다. 그래서 거리를 걷다 보면 하얀 살결의 러시아인이 훨씬 눈에 많이 띄고 간간이 우리와 얼굴이 비슷한 몽골계 사람도 눈에 띄었다.

아바칸의 11월 중순의 온도는 영하 17도에서 20도 정도로 추웠다. 여인네들이 아이를 썰매에 태워 끌고 다니는 풍경이 문득, 설국 속으로 들어왔다는 느낌을 주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잣을 우물우물 씹다가 껍질을 뱉었다. 시베리아에는 잣나무들이 많아서 어딜 가나 사람들이 잣을 많이 씹는다.

오지 중의 오지 같았지만 백화점에 들어가 보니 웬만한 상품은 다 들어와 있었다. 청바지와 화장품, CD음반, 전자레인지, 냉장고 그리고 한국산 TV가 보였다. 왁자지껄한 재래시장도 있어서 아바칸이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또한 서울이란 이름의 레스토랑도 있었다. 사할린에서 살던 교포가 이곳에 와서 하는 식당인데, 이미 한국의 기업인들이 가끔 드나들고 있다고 했다. 이렇듯 한국 사람들의 발길은 전 세계 구석구석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미누신스크 박물관의 남근 형태 거석.

눈 덮인 아바칸 길을 기웃거리며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엿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역시 가장 볼 만한 곳은 아바칸에서 20㎞ 떨어진 미누신스크였다. 3000∼5000년 전의 청동기 유물이 출토됐는데, 중국 은나라와 주나라의 유물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지역은 현재 러시아 영토에 속해 있지만 먼 옛날에는 몽골리안의 무대였던 것이다.

미누신스크는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나뉘어 있는데 신시가지에는 아파트 등 현대적인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고, 구시가지에는 수백년 전의 목조가옥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구시가지 중심에는 러시아 정교회 사원이 있고 사원 근처에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원래 마티아노브라는 사람이 1877년에 만든 박물관으로 처음에는 바위와 벌레를 수집해서 전시했지만, 지금은 청동기시대와 스키타이인의 무기 그리고 거석문화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그곳에 전시된, 사람 몸의 두세 배는 됨직한 크기의 거대한 선돌들은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태평양의 이스터 섬에 있는 석상들처럼 커다란 얼굴 형상, 혹은 남자의 성기 형상처럼 보이는 거대한 선돌들도 보였다. 동물 그림들, 수렵하는 모습 등을 바위에 새긴 암각화들도 있었다.

이런 거석들은 시베리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한국에서도 볼 수 있지만 지중해 부근에도 많다. 유명한 영국의 스톤헨지 역시 기원전 2800년쯤부터 만들어진 거대한 환상 열석들이다. 이런 거석들은 천문대 역할을 했다는 설도 있고 매장에 관련됐을 것이란 설도 있는데, 어쨌든 미누신스크는 수천년 전 이런 문화가 크게 번성했던 아시아와 시베리아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러시아에서는 사람들이 혈액순환에 좋아 자작나무 가지로 온몸을 치며 사우나를 한다는 소리를 들어서, 호기심 어린 마음을 안고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휴게실이 있고 그곳을 통과하니 공중탕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웬 할머니가 홀딱 벗은 남자들 사이를 태연히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있어서 난감했다.

안을 들여다보니 탕이 있는 게 아니라 각자 양동이에 뜨거운 물을 받아서 끼얹고 있었다. 한쪽에는 자작나무 가지가 쌓여 있었고, 사람들은 그 가지로 자기 몸을 때리고 있었다. 나도 하고 싶었지만 탕도 없고 썰렁한 데다 탈의실 옷 보관함도 허술해 보이고 할머니 앞에서 옷 벗기도 싫어서 그냥 나왔다.

그런데 돌아나오는 나를 보고 휴게실에 있던 이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원래 러시아는 목욕탕에서 몇 시간씩 얘기하고 술 마시는데 갑자기 이방인이 들어왔다가 슬그머니 나가는 것을 보니 우스웠나보다. 웃음소리가 너무 시끄럽자 할머니가 화를 냈고, 사내들의 웃음은 더욱 크게 폭발하고 말았다.

엉거주춤 돌아서던 나도 장난기가 들어, 그들에게 코믹한 웃음을 지으며 ‘다스비다니야(안녕)’라고 인사말을 했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발을 동동 구르는 이, 허리를 잡고 고꾸라지는 이, 웃다가 맥주가 목에 걸려 켁켁 거리는 이, 그러다 의자 밑으로 엎어지는 사내도 있었다. 벌거벗은 사내들의 난장판을 보던 나 역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여행 정보

▲숙소:아바칸에는 1박에 80달러를 넘는 인투리스트 호텔부터 20∼30달러 하는 중급호텔, 6∼8달러의 저렴한 하카시야 호텔, 아바칸 호텔 등 다양한 숙소들이 있다.

▲교통:아바칸에서 미누신스크 가는 버스는 버스터미널 2번 플랫폼에서 약 20분 간격으로 있다. 아바칸에서 모스크바까지 직접 가는 열차도 있다.

by 100명 2007. 4. 13. 1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