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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 예카테린부르크 | ||
[세계일보 2005-01-13 16:24] | ||
예카테린부르크는 1723년에 건설되었는데, 그 목적은 우랄산맥에 광범위하게 퍼진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완공되기 약 46년 전인 1870년에 이미 이곳까지 철도가 들어왔다. 동쪽에서 예카테린부르크로 가려면 시베리아에서 가장 큰 기차역, 가장 큰 도서관, 가장 큰 발레극장, 가장 큰 공항 등을 자랑하는 노보시비르스크란 도시를 거쳐야 한다. 이 도시에서 횡단열차를 타고 서쪽으로 약 20시간 정도 달리자 예카테린부르크가 나왔다. 첫 발을 디디자 웅장한 건물과 화려한 상점, 그리고 세련된 점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유럽 쪽으로 다가왔다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장 볼 만한 곳은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군주인 차르 니콜라이 2세와 일가족의 처형지다. 역을 등지고 남쪽으로 약 2㎞ 정도 걸어가니 언덕이 보였고 오른쪽에 작은 십자가와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 뒤편에 조그만 러시아정교회 사원이 있는데, 안에서는 몇몇 러시아인이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고 있었다.
◇황제 가족 사살명령을 내린 스베르들로프의 동상. 차르 니콜라이 1세는 매우 무능했고 2세는 그보다 더 무능했다. 차르가 된 후 러일전쟁에서 패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패했다. 또 차르의 부인은 시베리아 출신의 라마승 라스푸틴에게 홀렸다. 혈우병에 걸렸던 그녀의 아들을 라스푸틴이 고쳐 주었다고 믿고 그에게 많은 권력을 주라고 니콜라이 2세를 조종했다. 급기야 그녀와 라스푸틴 사이에 불륜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민심은 이반했다. 결국 1917년 2월혁명에 의해 차르는 퇴위했고, 1917년 10월에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군과 반혁명군 간 싸움 속에서 차르의 죽음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드디어 1918년 7월 16일 밤, 니콜라이 2세와 그의 부인 그리고 다섯 아이들은 볼셰비키스트 야코프 스베르들로프의 명령으로 이곳에서 총살당했다. 소련 붕괴 후 그들의 유해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베드로와 바울 성당으로 옮겨졌다. 또 공산주의 시절 스베르들로프의 이름을 딴 도시 이름 스베르들로프스크는 1991년 시민 투표로 옛 이름인 예카테린부르크로 바뀌었다.
◇차르 니콜라이 2세와 그의 부인. 예카테린부르크는 예카테리나 여제 2세를 기념하기 위한 도시 이름인데, 그녀는 독한 여자였다. 표트르 대제가 죽자 수십년간 러시아 정치는 극도로 혼란해서 차르가 열 차례나 바뀌었는데, 그 중 일곱 번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 혹은 남편과 부인 사이에 일어난 살해와 쿠테타 등에 의해서였다. 그 기간에도 강력한 권력을 잡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예카테리나 여제였다. 독일의 프러시아군 장교의 딸이었던 그녀는 남편을 독살하고 여제에 오른 후 폴란드를 합병하고 우크라이나 전역을 차지했으며, 크림 반도를 장악했다. 또한 시베리아와 동북아시아, 알래스카까지 러시아 영토를 확장한 강력한 군주였다. 하지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귀족들에게 국유지를 나눠 주고 농노제를 더욱 강화해 많은 자작농을 농노로 전락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1800년 러시아 인구 3600만명 중 약 2000만명이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는 농노였기에 이런 극심한 빈부격차 속에서 혁명의 불씨는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는 돌고 돈다. 니콜라이 2세를 죽인 공산주의자들은 망했고 러시아인들은 니콜라이 2세와 가족들을 위해 성호를 긋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약 1㎞ 떨어진 곳에서 ‘황제를 쏴라’ 하는 몸짓으로 서 있는 스베르들로프의 동상은 저녁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앞으로 또 100년이 지난 후 역사의 평가는 어떤 것일까? 돌고 도는 세상을 모두 보고 싶지만 100년을 못 넘기는 인간 수명 앞에서 쓴웃음만 삼키게 될 뿐이었다. 여행작가
■여행정보 ▷숙소:예카테린부르크의 저렴한 숙소는 만원인 경우가 많다. 숙박을 못 하고 몇시간 정도 시간을 내어 돌아본다면 역 근처에 있는 수하물 보관소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몇백원 정도에 안전하게 짐을 맡긴 후 빈몸으로 구경할 수 있어 편리하다. ▷예의:콤파트먼트로 된 횡단 열차 안에서는 묵시적인 예의가 있다. 겨울에 훈훈한 열차 안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려면 외투와 속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동성끼리면 상관없지만 남녀가 같이 있을 경우, 한편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예의다. 대개 남자가 먼저 갈아입은 후 밖에 나가 있어 준다.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비:철도와 도로 사이에 있기에 이곳을 보려면 따로 시간을 내서 가야지 기차를 타고 가면 보이질 않는다. 우랄산맥은 언덕처럼 낮아서 언제 통과했는지 모를 정도다. ■여행 에피소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지는 약 36시간이 걸리는 길로, 저녁 기차를 타면 2박3일이 걸린다. 4인실 쿠페의 2층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다가 심심하면 바깥의 풍경을 구경하는, 조금은 지루한 길이었다. 내가 탄 객실 중간에 중년 남녀가 있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모르는 사이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가까워지더니 하루가 지나자 연인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밤새도록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고 식사와 술을 같이하고 같이 나가 담배를 피우는데 매우 다정스럽게 보였다. 그런 광경을 보니 예전에 본 영화 ‘비포 선라이즈’가 생각났다. 기차 안에서 흘러 나오던 노래도 ‘러브 스토리’ ‘로미오와 줄리엣’ ‘남과 여’ ‘대부’ ‘엠마누엘 부인’ 등 감미로운 서양 영화음악들이었다. 홀로 침대에 누워 그들의 다정함을 바라보자니 은근히 질투심이 날 정도였는데, 멀고 먼 길을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이니만큼 이런 즉석 연인들을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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