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적도의 나라'' 르완다
[세계일보 2005-04-07 21:21]

20세기 최대의 학살이 벌어졌던 르완다는 내전 중에 전체 인구 700만명 중 100만명이 죽었다. 이 참혹한 내전의 원인은 종족 간의 갈등이지만, 그 갈등을 심화시키는 데 벨기에의 식민 지배가 큰 영향을 미쳤다.

르완다의 대표적인 부족은 1000년경부터 르완다에 정착해 농경을 시작한 후투족과 15세기 북방에서 소를 몰고 내려온 투치족이다. 유목민인 투치족은 르완다 전체 인구의 9% 정도밖에 안 되는 소수지만, 수백년 동안 약 90%인 후투족을 지배해왔다. 그러다 1899년부터 1916년까지 독일의 지배를 잠시 받았고, 그 후 약 40년 가까이 벨기에의 통치를 받았다.

벨기에는 원래 지배자였던 투치족을 이용해 르완다를 간접 통치하는 과정에서 투치족에게 더 많은 정치·경제·교육적 특혜를 부여하며 ‘분열과 지배(devide and rule)’ 정책을 편다. 그러자 다수이며 피지배자인 후투족은 자신들의 불평등한 처지를 깨달아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벨기에가 물러나던 1962년에 르완다 공화국을 탄생시키며 후투족 출신의 대통령이 취임한다.

◇한가하게 여가를 즐기는 노인들.◇르완다 여인들.<왼쪽부터>

이에 기득권층인 투치족은 반발했고 후투족은 그들을 탄압한다. 이런 과정에서 투치족과 후투족은 서로 싸우며 부족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1994년 후투족 출신의 대통령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암살당한다. 결국 후투족 강경파는 부족 간의 갈등을 대학살로 마무리짓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우선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해 온건파를 제거한 뒤, 본격적인 투치족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르완다 전역에는 매일같이 투치족과 후투족 온건파의 시체들이 길거리에 쌓였는데, 더욱 충격적인 일은 군인뿐만이 아니라 선동에 흥분한 후투족 시민과 여자,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나서서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이다.

특히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 시내는 시체들로 메워지면서 피와 살 썩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불과 100일 동안에 르완다 전국에서 100만명이 학살당했으니 매일 1만명씩 죽었다는 얘기다.

이에 경악한 투치족 게릴라들은 다시 르완다를 침공해 후투족을 몰아내 정권을 잡고, 후투족 강경파들은 인접국가로 이동해 게릴라 활동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엔평화유지군이 개입하고 우리 한국군도 파견했지만 평화를 회복한 뒤 모두 철수한 상태다.

◇밭으로 개간된 산들. 국토가 좁고 인구가 많은 르완다는 숲이 울창했던 산을 밭으로 일군 곳이 많다.

◇천진난만한 르완다 아이들. 벨기에의 지배를 받았던 까닭에 프랑스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관광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이런 참혹한 과거를 안은 키갈리는 현재 평화로우나 빈곤하다. 키갈리는 산 위에 건설된 도시로 비록 시가지에는 현대식 건물들도 들어섰지만, 언덕에는 아직도 곳곳에 허름한 판잣집, 돌집 등이 널려 처참한 난민촌 풍경이 펼쳐진다.

이들은 벨기에의 지배를 받은 탓에 프랑스어를 쓰고 있는데, 초등학교 아이들은 외국인을 보면 ‘봉주르’를 외치고 이어 ‘돈 좀 달라, 볼펜 좀 달라’는 영어가 튀어나온다. 가난하나 천진난만한 그들을 보면 우리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 가슴이 아파온다.

르완다의 약 2만6000㎢의 땅에 800만여명이 거주해 아프리카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 국토는 좁고 인구는 많아 식량이 부족하다보니 산을 태워 밭을 일구느라 화전을 많이 만들었다. 화전은 몇 해 동안은 수확 할 수 있으나, 지력이 떨어지면 또다시 산의 나무를 없애고 화전을 만들 수밖에 없어 국토는 점점 황폐해졌다. 18세기에 이곳을 방문했던 독일 탐험대가 아프리카의 스위스라고 부를 정도로 우거진 산림을 자랑했던 르완다는 이제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사실만 놓고 보면 르완다에는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비참한 전쟁을 겪었던 한국이 다시 일어섰고, 100년 전 갈가리 찢겨졌던 중국이 세계의 중심을 향해 달리고 있으며, 병든 코끼리처럼 비틀거리던 인도가 몇십년 후면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100∼200년 후의 아프리카와 르완다는 지금보다는 훨씬 살기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여행작가

■ 여행 에피소드

르완다 키갈리를 돌아보고 우간다로 가기 위해 새벽에 버스터미널로 왔을 때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우르르 한 떼의 사내들이 몰려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를 외치자 희한한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7, 8명의 사내들이 달려들어 내 팔, 목덜미, 배낭 등을 거머쥐고 자기네 차로 끌고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쪽저쪽에서 잡아끄는 통에 내 몸은 갈기갈기 찢길 것 같았는데, 결국 힘센 친구한테 개처럼 질질 끌려가다 안경이 떨어지고 말았다. 화가 치솟아 고래고래 소리치자 내 기세에 눌려 손을 떼었는데, 이번에는 웬 영수증철을 들고 온 사내가 차장이라며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그를 따라가자 이번에는 다른 사내가 ‘저놈은 차장이 아니다’고 외치며 고릴라처럼 펄펄 뛰는데 극도로 흥분해서 검붉은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따라갔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아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미니버스를 탔는데 다른 승객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들어오는 대로 잡혀서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서 버스를 탔다.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숙연해졌다. 그 모습들이 가난한 나라, 직업도 별로 없는 나라에서 먹고살려는 인간의 처절하고도 장엄한 몸짓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 여행정보

르완다를 가려면 우간다의 국경 도시 카발레까지 가야 한다. 카발레에서 미니버스를 타면 2시간 안에 갈 수 있다. 비자는 국경에서 약간의 돈을 내고 얻을 수 있다.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 사람들은 거의 모두 불어를 쓰므로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약간이나마 불어를 배워 가는 것이 좋다. 현재 치안 상태는 괜찮지만, 산악지대에는 아직도 반정부 게릴라들이 있어 간간이 전투가 벌어진다고 하니 조심할 일이다. 밤에는 가로등이 없어 컴컴하고 안전을 장담할 수 없으니 외출을 삼가는 것이 좋다.

by 100명 2007. 4. 13. 1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