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서역의 입구 중국 투르판
[세계일보 2005-05-19 18:27]

둔황에서 밤 기차를 타고 서역으로 가다 보면 북쪽으로 톈산(天山)산맥이 어둠 속에서 뻗어 나간다. 일본 열도를 다 품에 안을 수 있는 거대한 그곳에는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다. 다른 해와 다른 달, 다른 바다와 다른 인종, 그리고 다른 동식물….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아침이 오고 기차는 투르판역에 도착한다.

투르판역에서 투르판 시내까지는 차로 약 한 시간 거리다. 내리자마자 달려드는 위구르족 호객꾼들의 차량이나 미니버스를 이용해 얼마쯤 달리다 보면 길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동서 120km, 남북 60km로 해발 마이너스 154m의 깊은 바닷속 같은 투르판은 세계에서 이스라엘의 사해 다음으로 낮은 분지다.

투르판의 역사는 길다. 중국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2000년 전에도 이곳에는 흉노족, 이란계, 위구르족들이 이룩한 오아시스 국가들이 있었다. 현재는 한족과 위구르족 등 24만명이 섞여 살고 있으며, 위구르족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서역의 입구이다.

◇고창고성을 지나는 마차. 고창고성에 살던 한족은 당 태종이 보낸 소정방에 의해 서기 651년 멸망한다.

개방화 물결을 탄 투르판은 현대식 건물과 공원들이 생기고, 거리는 번잡스러워졌다. 그러나 포도 덩굴 우거진 낭만적인 길들은 예전과 같다. 투르판 근처의 유적지들은 모두 폐허의 미를 자랑하고 있다. 아름다운 계곡이 펼쳐진 인적 없는 화염산 중턱에는 베제크리크(바이쯔커리커) 석굴이 고즈넉이 들어서 있는데, 석굴 안의 수많은 불상과 벽화들은 서양 탐험대에 의해서 반출되고 이슬람교도들의 소행으로 눈이 뽑히고 팔과 목이 잘려 나갔지만, 한적한 이곳에 서면 폐허의 미를 감상할 수 있다.

고창국의 도성이었던 고창고성 역시 폐허로 남아 있다. 후한이 멸망한 후 투르판 분지는 흉노족, 티베트족, 돌궐족(투르크족), 한족의 세력 각축장이었다. 고창고성에 살던 이들은 한족이었는데, 이들은 당나라보다 오히려 돌궐족과 가까웠다. 결국 당 태종은 소정방을 보내 서기 651년 고창국을 멸망시킨다. 백제를 멸망시켰던 그들은 이 머나먼 서역 땅에도 등장했던 것이다.

◇바싹 마른 화염산의 전경. 약 100㎞나 뻗은 이 산을 현지인들은 ‘쿠즈로다고(붉은 산)’라고 부르며, 서유기에서 삼장법사 일행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당하는 무대다.

화염산 역시 메마른 산이다. 약 100km에 이르는 길고 긴 이 산을 현지인들은 ‘쿠즈로다고’라 부르는데, 빨간 산이란 뜻으로 불길이 치솟는 형상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이 산은 ‘서유기’에서 삼장법사 일행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당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현재 투르판의 주요 민족인 위구르족 무희들. 밤이 되면 인근 호텔의 야외 무대에서 화려한 복장의 무희들이 춤을 춘다.

투르판 근교의 유적지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곳은 교하고성(交河故城)이다. 글자 그대로 하천이 마주치는 곳에 세워진 성인데, 동·서·남쪽은 약 30m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그 밑에는 하천이 흐르고 있다.

남북의 길이 1600m, 동서 폭이 330m인 이 성은 약 2000년 전 한나라 시대의 폐허다. 한때 번성했지만 폐허가 된 이곳은 고창고성처럼 벽돌을 쌓아 만든 것이 아니라 위에서 파내려가 만들었다. 그만큼 견고한 성 안에는 지금도 그 시절의 주택가, 시장, 절, 관청, 감옥 등의 터가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라 유네스코는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투르판에는 생명이 약동하는 힘도 있다. 화염산에서 내려오는 지하수를 파낸 카레즈는 예로부터 투르판의 전통적인 우물이었다. 투르판에 널려진 수백개의 카레즈에 모여 주민들은 노래를 불렀고 춤을 추었으며 연애를 했다. 지금 그들은 우물가에서 노래를 부르지는 않지만 무희들이 관광객들을 위해 공연하고 있다.

◇화염산에서 내려오는 지하수를 파낸 카레즈. 수천개에 이르는 이 투르판의 전통 우물은 당시 주민들이 춤과 노래를 즐기며 연애하던 장소였다.

연강우량 16.6mm, 여름에는 기온이 보통 섭씨 50도, 지표면 온도는 80도를 넘는 살인적인 열기를 뿜어대는 이곳에서는 서늘한 밤이 되면 호텔의 야외 무대에서 화려한 복장의 위구르족 무희들이 나와 춤을 추고 사내들은 코믹한 오리춤을 추며 흥을 돋운다. 그리고 공연이 끝날 때쯤에는 무희들이 관객들을 무대로 끌어올려 난장을 벌인다.

투르판의 매력은 폐허의 미와 함께 이런 난장 가운데 벌어지는 삶의 방기 아닐까? 머나먼 서역의 밤을 잠시 불사르는 순간, 그 일탈과 방기 속에서 문득 다가오는 자유가 여행자들을 즐겁게 한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나는 투르판에 두 번 갔었다. 한번은 11월 말, 또 한번은 4월 말이었다. 11월 말은 항상 쌀쌀했고, 4월 말에 찾았을 때 아침에는 선선했지만 낮에는 뜨거운 햇볕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후만 되면 공기에 수면제를 탄 것처럼 잠이 몰려오는데, 시장의 상인들도 모두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았고, 온 도시가 깊은 잠의 늪 속으로 빠져 들었다. 낮잠을 자고나니 오후 8시, 베이징 같으면 캄캄한 밤이겠지만 서역 한가운데인 이곳은 아직도 날이 훤했다.

결국 해는 밤 10시나 되어서야 서서히 졌고 자정이 되어서야 밤 기분이 나기 시작했다. 중국은 거대한 땅이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서역으로 가다 보면 이렇게 다른 나라에 온 것처럼 시차를 느끼게 된다.

■여행 정보

▷숙소: 버스터미널 근처에 새로 생긴 투르판 대반점의 쾌적한 트윈베드 룸이 한국 돈으로 약 2만5000원, 오아시스 호텔의 위구르족 전통 스타일 트윈은 약 4만8000원(비수기에는 약 3만원까지 할인), 여럿이 같이 묵는 다인방은 1인당 약 4000원.

▷교통: 둔황역에서 기차로 8시간 정도 소요. 투르판의 유적지는 모두 수십km 떨어져 있어서 차를 대절해야 한다. 기사 딸린 승용차를 하루 종일 이용하는 데 약 4만5000원. 여행자들이 많은 성수기에는 미니 버스들도 많이 다니는데 1인당 약 9000원이면 된다.

▷공연: 위구르족 무용 공연은 투르판대반점 투르판빈관 오아시스호텔 등에서 하는데, 포도 축제가 열리는 여름에는 매일 열리지만 비수기에 단체 관광객이 오는 날 열린다. 그 중에서 오아시스호텔 야외 무대의 공연이 가장 흥겹다. 입장료는 약 5000원.

▷주의사항: 여름에 가면 자칫 화상과 탈수증에 시달릴 수 있다. 물과 밀짚모자, 선글라스, 선탠 크림은 필수고 낮에는 잠을 자두는 것이 좋다.

by 100명 2007. 4. 13. 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