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 기행]〈36〉중국 우르무치
[세계일보 2005-06-02 16:36]

내 핏속에 기마민족의 혼이 깃들여 있고, 내 뼛속에 바람처럼 초원을 달리던 기억이 서려 있어서일까. 톈산북로, 즉 초원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몹시 뛰었다. 투루판에서 우루무치로 가는 버스는 톈산을 넘어갔다. 멀리서 바라본 눈 덮인 톈산산맥은 신비로우나, 막상 다가가니 거대한 암벽과 메마른 계곡으로 이루어진 황량한 돌산이었다. 한 시간 정도 험한 톈산을 오르자 물이 흐르는 계곡이 나왔고 뒤이어 푸른 초원과 양 떼, 싱그러운 나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톈산북로 초원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이 동서 문물 교류의 길은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유목민이었던 흉노족 돌궐족 몽골족이 그들로, 기개가 대단했었다.

◇가까이서 본 톈산산맥. 황토빛 암벽이 넓게 펼쳐져 있다.

하늘에는 오직 하나의 신이 있고 땅에는 오직 하나의 군주 칸이 있다. “말이 달릴 수 있는 땅에 사는 자, 귀가 있는 자 모두 들을지어다. 우리에게 도전하는 자는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붙잡으려 해도 손이 없으며, 걸으려 해도 발이 없게 될 것이니라. 신은 짐에게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모든 영토를 부여했노라.”

13세기 몽골의 구유크 칸(3대 정종)은 로마교황에게 그런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한족이 지배하는 길로 산업화의 물결이 밀려드는 현장이다. 초원에는 풍력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대형 바람개비들이 가득 차 있었다. 버스 안에서는 위구르 말의 랩음악이 울려퍼졌으며 시도 때도 없이 휴대전화 소리가 울려댔다.

◇천지 부근에 사는 카자흐족의 게르. 황토로 다져진 바닥 위로 양탄자가 깔려 있어 푹신하다.

변화의 물결은 초원뿐 아니라 대도시 우루무치도 뒤덮고 있었다. 몽골말로 ‘초원의 목장’이란 의미의 그 도시는 모든 곳이 공사 중이었다. 낡은 아파트와 민가는 사정없이 헐렸으며, 새로운 고층 건물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이런 풍경 속에서 서역의 정취를 느끼고 싶으면 천지(天池)로 가야 한다. 백두산에만 천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역 땅 톈산산맥의 깊은 골짜기에도 해발 1910m의 천지가 숨어 있다.

버스를 타고 좁고 가파른 산길을 기우뚱거리며 두어 시간 가니 천지가 나왔다. 여름에는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진남빛 물이 넘실거린다지만, 5월 초에는 여전히 얼어 있었고 멀리 주봉인 보거다(博格達·5445m) 정상의 흰 눈이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5월 초에도 얼어 있는 천지 풍경. 얼음이 녹으면 진한 남빛을 자랑한다.

면적 3㎢에 수심이 100여m이 거대한 호수. 톈산산맥 깊은 곳에 이런 호수가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그만큼 예전부터 천지는 주변 부족들에게 신성시되었다.

기원전 1000년쯤 주나라 목왕이 천지에 올랐다가 호수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수영을 즐기는 한 여인을 보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 여인은 바로 서쪽 나라를 다스린다는 전설의 서왕모였다. 서왕모는 원래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흉측한 모습에 재앙과 죽음을 관장하며 영생과 불사의 능력을 지닌 생명의 여신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죽음보다는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되었다.

이런 전설을 되새기며 천지를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얼굴에는 깊은 감회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백두산의 천지와 이름이 같은 호수에 선 우리보다 더 감회가 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6000㎞쯤 떨어진 이곳의 천지는 우리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언어학자 강길운 박사는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라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배달이란 말은 박달에서 왔으며 이것을 이두문으로 백산(白山)이라 표기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일치한다. 다만 박달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언어학적으로 보면 ‘박(바쿠)’이란 만주어로 호수를 뜻하고 ‘달(타아르)’은 터키어로 산을 뜻한다. 그러니 박달이란 곧 ‘호수가 있는 산’을 의미했고 이는 천지가 있는 백두산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되었다. 그러므로 배달민족은 호수가 있는 산을 신성시하고 그 주변에서 사는 민족을 일컫는다고 추정된다.”

우리 민족은 백두산뿐 아니라 먼 옛날 이 톈산산맥과 천지를 무대로 말을 달렸음이 틀림없을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톈산산맥의 천지와 초원을 보는 순간, 피가 불끈 솟구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유목민 집 ''게르''에서 하룻밤

방랑자 카자흐족 된듯 야릇

15년 전 천지에 처음 왔을 때 카자흐족의 집인 게르(유목민들의 거주지)에서 잔 적이 있다. ‘카자흐’는 원래 방랑자, 모험자를 뜻하는 터키어고, 부족의 구속이 싫어 떨어져 나간 이탈자들을 그렇게 부르다 보니 하나의 부족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카자흐스탄에 500만명이 거주하고 신장성 전역에 약 60만명이 흩어져 사는데, 톈산산맥에 일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그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잠도 재워주고 있었다.

11월 초인 그때, 저녁이 되자 호수 주변에는 추위가 몰려왔지만 안은 따뜻하고 푹신푹신했다. 중앙 쇠 난로에는 불이 뜨겁게 타고 있었고, 바닥에서 약 20㎝ 황토로 돋운 원형 방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그날 밤 잠이 잘 오지 않아 슬그머니 나와 천지에 서니 휘영청 달이 호수를 밝히고 있었다. 그 달빛에 취해 홀로 천지 주변을 거닐던 순간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짜릿한 희열이 솟구쳤다. 늘 미지의 세계를 향해 대책 없이 떠돌던 그 시절, 나 또한 방랑자인 카자흐족이 된 것만 같아서였다.

■여행정보

새로 생긴 보거다빈관은 가격에 비해 매우 좋은 편이다. 트윈이 우리 돈으로 약 7만원가량(비수기 때는 반값 정도), 여럿이 자는 다인실은 1인당 약 4000원이다. 투루판에서 우루무치까지는 버스로 약 2시간 걸린다. 천지 가는 대형 버스는 인민공원 정문 앞으로 가면 오전 중에 떠난다. 비수기 때는 그곳에 가면 조그만 여행사에서 나온 호객꾼들이 접근한다. 그들에 이끌려 미니버스를 타면 천지까지 왕복 4시간이나 걸리고 천지에서 2시간 정도 보내게 되니, 천지 구경에만 하루 정도를 투자해야 한다.

by 100명 2007. 4. 13. 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