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43〉영화의무대 홍콩
[세계일보 2005-09-22 17:09]

홍콩 영화는 한물갔다고 하지만 그래도 영화의 흔적들은 아직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주룽(九龍)반도의 번화가 침사추이에 청킹맨션(中慶大厦)이란 낡은 건물이 있다.

이곳은 왕자웨이 감독이 만든 ‘중경삼림’에서 린칭샤가 마약을 운반하기 위해 고용한 인도인들에게 밥을 사주고 옷과 신발을 맞춰 주던 곳이자 배신한 이들을 죽이던 무대이기도 하다.

''중경삼림''의 배경 캘리포니아 바

한때 왕 감독의 아버지가 이 건물 지하의 나이트클럽에서 일했다는데, 왕 감독은 그래서인지 인도인들의 낙천적이고 엉뚱한 면을 영화 속에서 잘 묘사했다.

원래 이곳은 싸구려 여행자 숙소가 몰려 있는 건물이다. 또 영화에서처럼 이 건물의 1, 2층에는 인도인들이 운영하는 상점, 환전소, 식당들이 많이 들어서 있고 장기체류하는 아프리카 흑인들도 자주 보인다. 이상하게도 이곳을 소개하는 글들에서 “위험하다, 조심하라”는 문구가 많이 보이는데, 겁낼 필요는 없다. 생업에 열중하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중경삼림’의 흔적은 홍콩 섬의 센트럴 역 부근에도 있다. 퀸스 로드 센트럴(皇后大道中) 역 근처의 란콰이퐁(蘭桂坊) 거리는 홍콩의 압구정동답게 화려한 곳이다. 이곳의 ‘캘리포니아 바’에서 왕징원에게 바람맞은 경찰관 663호 량차오웨이가 쓸쓸하게 술을 마셨다.

◇란콰이퐁의 캘리포니아 바

캘리포니아 바는 아직도 성업 중이지만 선머슴 같은 여종업원 왕징원이 마마스 앤드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부르던 패스트푸드점 ‘미드 나이트 익스프레스’는 사라졌다. 영화가 히트한 후 세가 올라서 몇 번 주인이 바뀌었는데, 현재는 문을 닫았다. 감상과 문화가 자본의 힘 앞에 쫓겨나는 현실은 어디나 똑같다.

‘중경삼림’의 세계는 란콰이퐁 거리에서 얼마 안 떨어진 800m짜리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 부근에도 있다. 높은 언덕을 깎아 주택가로 만들었고 그곳에 에스컬레이터가 달리고 있는데, 주변에는 레스토랑, 카페, 기념품가게 등이 즐비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다 보면 주변에 조그만 집들이 자주 눈에 띄는데, 왼쪽에 있는 집 중의 하나가 자기 세계 속에 빠져 ‘몽중인(夢中人)’으로 살던 량차오웨이의 집이었다.

예전에는 일본 여성들이 영화에서처럼 네 번째 에스컬레이터에서 무릎을 굽힌 채 이 방을 훔쳐 보았다는데, 지금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다. 이미 1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다 중간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캐슬 로드가 나온다. 성벽이 있는 이 고적한 길에서 공중전화 부스를 설치해 놓고 ‘아비정전’을 찍었다고 한다. 1960년대 장궈룽과 류더화 그리고 장완위 사이의 가슴 아픈 사랑이 서린 거리다.

그 외에도 캔턴(Canton) 로드는 영화 ‘첨밀밀’에서 리밍이 장완위를 자전거에 태우고 달리던 거리고, 그들이 처음 만났던 맥도널드 햄버거 집이 근처에 있어서 첨밀밀을 잊지 못하는 영화 팬들이 종종 들른다.

''화양연화''의 골드핀치레스토랑

또 ‘아비정전’에 나오던 고풍스러운 퀸스카페(皇后飯店)와 ‘화양연화’에서 배우자들이 서로 불륜을 저지른 사실을 확인하고 사랑을 이어가는 골드핀치(Goldfinch) 레스토랑이 코즈웨이 베이(Causeway Bay)역 근처에 있으며, ‘영웅본색’에서 저우룬파가 성냥개비를 씹던 빅토리아 피크 등 수많은 영화의 무대들이 홍콩에 있다.

냉엄한 현실에서 영화 속의 무대를 찾아다니는 행위가 유치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무한대로 펼쳐진 공간과 시간의 교차점에서 잠시 피어오르는 꿈과 환영이 현실임을 안다면, 신화와 전설 그리고 영화가 ‘촉촉한 현실’이 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음식과 쇼핑을 넘어서 촉촉한 현실 속에서 바라본 홍콩은 더욱 낭만적이었다.

여행작가

■여행 에피소드

주룽반도의 번화가 네이선(Nathan) 로드에는 늘 ‘롤렉스 카피(copy)’를 행인들에게 속삭이는 인도인들이 있다. 가짜 롤렉스 시계를 파는 것이다.

싼 것은 600홍콩달러(약 9만원)부터라는데, 나는 시계보다 이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하루 평균 한두 개 정도 판다는데 간신히 먹고사는 벌이라 했다. 나도 장난 삼아 행인을 향해 외쳐 보았다. “롤렉스 카피! 롤렉스 카피!” 행인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흉내내는 나를 보며 인도 친구들은 낄낄대며 웃었다.

잠시 쉬던 그들은 다시 ‘근무 시간’이 오면 날카로운 눈빛으로 ‘롤렉스 카피’를 외쳐댔다.

냉대를 당하고 수모를 당하면서도 악착같이 생존을 위해 외쳐대는 그들. 산다는 것이 장난이 아닌, 서글프고도 냉엄한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이었다. 하긴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여행정보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 이용은 오전 10시15분부터가 편리

청킹맨션은 지하철 침사추이 역에서 내리면 된다. 란콰이퐁에 가려면 지하철 센트럴 역에서 내려 D-1 출구로 나와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대로 퀸스 로드 센트럴이 나온다.

그 길을 건너 아길라 거리(D’ Aguilar St·德己立街)이라는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다 스탠리 거리와 웰링턴 거리를 지나면 나온다.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오전 10시15분부터 밤 12시까지는 위로 올라가지만, 오전 6시부터 오전 10시까지는 아래로 내려간다.

그러므로 관광객들이 이용하기에 편한 시간은 오전 10시15분부터다. ‘첨밀밀’을 촬영한 맥도널드는 침사추이역 근처의 페킹로드(北京道)와 한커우로드(漢口道)가 교차하는 모퉁이에 있다.

코즈웨이 베이 역의 F출구로 나와 10분 정도 걸어가면 리 가든 쇼핑센터가 나오는데, 그 맞은편에 퀸스카페가 있고, 리 가든 쇼핑센터 뒷골목인 란퐁로드(蘭芳道)에 골드핀치 레스토랑이 있다.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

by 100명 2007. 4. 13. 1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