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회기행]<50>베트남 꾸찌땅굴
[세계일보 2005-12-15 20:51]

베트남전은 기가 막힌 ‘전쟁 문화유산’을 남겨 놓았다. 호찌민(사이공)시 서북쪽 75㎞ 지점에 있는 꾸찌(Cu Chi)땅굴은 전쟁이 없었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유적지다. 총 길이 약 250㎞의 땅굴은 이미 프랑스와의 전쟁 때(1948∼54) 48㎞ 정도 만들어졌다가 미군과 싸우면서 연장됐다. 66년 미군 제25 보병사단이 꾸찌 마을에 주둔했는데, 밤마다 미군을 습격하던 베트콩은 이 땅굴 속으로 숨어버렸다.

현재는 관광지가 되었다. 정글 속을 안내하던 안내원이 갑자기 관광객들에게 땅굴 입구를 찾아보라고 했다. 관광객들의 눈에는 도저히 분간이 안 되었는데, 안내원이 땅 색깔의 나무 뚜껑을 들어올리자 가로 70㎝, 세로 50㎝ 정도의 구멍이 나타났다. 몸집이 큰 미군은 도저히 들어갈 수 없고 베트콩만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구멍이었다. 계속 걸어가 보니 대나무 숲이 우거진 땅에는 보일락말락한 조그마한 공기 구멍도 보였다. 군견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베트콩은 미군이 사용하는 비누를 써서 군견들의 코를 교란시켰다고 한다.

드디어 안내원을 따라 땅굴 속을 기어 들어가니 군데군데 전등을 설치해 놓았는데 머리를 약간만 들어도 부딪칠 정도로 좁았다. 그런데 그 굴은 베트콩, 즉 베트남민족해방 전사들이 실제 사용하던 땅굴을 관광객을 위해 두 배 크기로 확장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 동굴이 얼마나 작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꾸찌 땅굴은 호미와 망태기를 이용해서 팠다는데, 토질이 연해서 팔 때는 쉽지만 막상 파고 나서 공기와 접촉하면 딱딱하게 시멘트처럼 굳어버린다고 한다.

◇땅굴 투어를 마친 여행자들.(사진 위), 돈을 내고 총을 쏘는 관광객들.

땅굴을 기어가는 동안 숨이 막혀 오고 입에선 단내가 났다. 한참을 기어가자 넓은 공간이 나왔다. 환자 수술실이라는데, 꾸찌 땅굴 안에는 그 외에도 여러 용도의 사무실, 방, 취사장 등이 있었다. 다시 굴을 기어가자 약 5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나왔다. 작전 회의실이라 했다. 책상이 있었고 뒤에는 ‘독립과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뜻의 구호가 걸려 있었다. 호찌민이 늘 주장하던 말로, 그 당시 민족해방전선 전사들의 신조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작전 회의실 구석에 함정이 있었다. 가로, 세로 약 1m 정도의 구멍 속에는 날카롭고 길쭉한 죽창이 꽂혀 있어서 바로 위의 입구로 들어오는 침입자들은 모조리 그 함정으로 떨어져 죽게 되어 있었다. 죽창이나 쇠꼬챙이에는 파상풍을 일으키도록 동물의 소변 등이 묻혀졌다고 한다.

구석에는 매우 좁은 땅굴이 보였는데 적이 침투하면 베트콩은 그 굴을 통해 지하 2, 3층의 통로로 내려와 멀리 떨어진 사이공 강변의 출구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러니 미군들은 땅굴 입구를 발견하기 힘들었고, 발견해도 들어가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더라도 함정에 빠지기 일쑤였다.

결국 미군은 고엽제를 살포했다. 금방 나뭇잎이 시들어서 다 떨어지고 나면 베트콩은 숨을 곳이 없기에 소탕하기 쉬울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미군은 성공하지 못했다. 후일 고엽제로 수많은 피해자만 남긴 미군은 1960년대 말 B-52(전략폭격기)로 꾸찌 마을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초토화 작전으로 많은 땅굴이 함몰되어서 베트콩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지만, 이 무렵부터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던 미군은 끝내 이곳의 베트콩을 완전히 섬멸하지는 못했다.

다시 땅굴을 기어가니 5∼6평 남짓의 공간이 나왔다. 사령관실이었다. 구석에 함정이 있었고 천장에는 지금도 박쥐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이 박쥐는 모기를 먹고 사니 땅굴 속에 숨었던 베트콩은 모기에 시달리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땅굴 안에서 밥을 할 경우 연기가 3∼4개의 땅굴 공간에 머물다 조금씩 흩어져 나가게 해 밖에서는 연기를 쉽게 감지할 수 없었다고 한다.

땅굴 견학을 마치고 나면 돈을 내고 사격장에서 총을 쏠 수 있다. 격세지감을 느꼈다. 그들과 싸웠던 미국인과 한국인 등이 돈을 내고 총을 쏘는 것이다. 초현대식 무기를 갖고 폭탄을 퍼붓고 고엽제를 뿌린 미군이 가장 원시적인 호미와 망태기를 들고 저항한 베트콩을 이기지 못한 그 현장은 이제 20세기의 신화가 되었다.

비참한 전쟁 속에서 이런 ‘문화유산’이 탄생한다는 것이 씁쓸하지만 이제 베트남 정부는 이런 것조차 돈을 벌기 위한 관광자원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전쟁을 딛고 일어선 베트남인들의 끈질기고 현명한 면을 여기서도 엿볼 수가 있었다.

여행작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꾸찌 땅굴 입구, 꾸찌 땅굴 안, 땅굴 안의 함정, 꾸찌 땅굴에서 투쟁하던 베트콩 마네킨.

■여행 에피소드

1993년 처음 호찌민시에 갔을 때 ‘꽁비엔 따이한(대한공원)’이란 곳에 갔었다. 1972년 7월 27일 한국군이 지은 팔각정과 공원은 평화공원이란 이름으로 바뀐 채 방치되어 있었다. 팔각정 2층에는 말라 비틀어진 인분만 즐비했다. 대충 돌아보고 나오는데 웬 30대 초반의 베트남 사내가 접근해 왔다. 내가 ‘따이한’이라는 사실을 알자 사내의 안색이 변했다. 흥분한 사내는 내 코앞에다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소리치는데, 머리로 받을 기세였다. 침이 얼굴에 튀겼고, 그는 계속 핏발 선 눈으로 고함을 질렀다.

나는 일절 대꾸하지 않고 꾸중을 듣는 학생처럼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 사내는 한참만에 내 앞에다 침을 뱉고는 사라졌다. 착잡했다. 옆에 있던 시클로 운전사에게 물어보니 그 사내의 형이 예전에 한국군에게 죽었다는 것이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뭔가 사연이 있지 않고는 처음 보는 이에게 다짜고자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 당시 그의 형은 베트콩이었을 것이다.

그 후 몇차례 호찌민에 가는 동안 베트남인의 한국인에 대한 인상은 점점 좋아져서 지금은 한류의 물결이 흐를 정도다. 하지만 베트남 여행을 하다 보면 전쟁의 상처가 있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되니 각별히 언행에 조심해야 한다.

■여행 정보

꾸찌 땅굴은 혼자 가기에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 대개 여행자 숙소가 많이 모여 있는 데탐거리에 있는 현지 여행사의 투어에 참가하는 것이 좋다. 대략 5달러 남짓이면 된다. 그 외에도 메콩강의 정글 투어, 베트남 민족종교인 까오다이(Cao Dai)교 사원 투어 등이 있다.

by 100명 2007. 4. 13. 1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