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52>베트남 중부도시 호이 안
[세계일보 2006-01-05 17:03]

베트남의 중부에 호이 안(Hoi An)이란 도시가 있다. 다낭에서 남쪽으로 30㎞ 떨어진 곳에 있는 고풍스런 도시로, 1999년 유네스코에 의해 구시가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에는 먼 옛날 참파(Champa) 왕국의 흔적과 중국인, 일본인들의 자취가 잘 보존되어 있다. 신시가지는 번잡스럽지만 옛 가옥들이 모여 있는 강변의 구시가지는 세월의 은은한 향기가 물씬 배어 있는 목조 가옥들과 그것을 개조해서 만든 조그만 호텔, 식당, 미술품 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다.

호이 안은 베트남에서 중국 화교들이 처음 정착한 곳으로 푸젠성향우회관, 광둥향우회관 등은 물론 수많은 중국풍의 고가가 남아 있다. 떤끼 고가(Nha Tan Ky), 풍훙 고가(Nha Co Phung Hung) 등 약 200년 전에 지어진 목조 가옥들은 중국풍에 베트남·일본식이 가미되어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 외에도 호이 안 역사박물관, 관운장 사당 등 중국의 정서가 많이 보이는 유적지들이 있다.

일본인의 자취가 서린 ‘일본교’도 있다. 1539년에 중국인 거주지와 일본인 거주지 사이에 만들어진 다리인데, 1637년 도쿠가와 바쿠후가 외국과의 교류를 금지하자 일본인들이 철수했고, 2차 세계 대전 후에 다시 나타난 일본인들은 상인들이 아닌 군인들이었다.

구시가지 바로 옆에는 투본강이 흐른다. 나룻배 몇 척이 떠 있는 한가로운 분위기지만, 호이 안이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했던 시절인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는 번잡스러웠을 것이다.

호이 안이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한 이유는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28년 북쪽의 하노이에서 일어난 레 러이(黎利)는 명나라의 지배를 물리친 후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한 레 왕조(1428∼1788), 즉 다이비엣(大越)이란 나라를 세웠다. 이 왕국은 16세기 중반에 찐씨가 지배하는 북부와 응우옌씨가 지배하는 남부로 분단된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고가가 들어선 거리, 풍흥 고가의 내부, 야자수 그득한 투본강 줄기, 민속공연

유럽인들이 베트남을 방문하기 시작한 때는 이 무렵이었다. 1511년 포르투갈 사람들은 말레이시아의 서부 해안 도시 말라카(멜라카)를 점령했고, 1540년에는 베트남 중부 해안의 호이 안으로 와 교역했는데 이곳을 팔리푸(Falifo)라 불렀다. 당시 호이안은 응우옌씨의 대외 무역항으로 포르투갈뿐 아니라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은 물론 중국 일본 및 동남아시아 각지에서도 많은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호이 안의 전성기는 16세기에서 17세기로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주민들의 상호 왕래가 금지되자, 외국에서 온 상인들은 남북 간의 교역을 통해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또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직접적인 무역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호이 안을 통한 중개무역으로 많은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번성하던 호이 안도 쇠퇴했다. 19세기 말부터 투본강에 실려온 침적토가 해안에 쌓이기 시작했고, 결국 바다가 너무 얕아져 큰 선박이 들어올 수 없게 되면서 국제무역항으로서의 명맥이 끊겼다.

대신 부근의 다낭이 국제항구로 등장한다. 한국도 이곳과 인연이 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의 해병대인 청룡부대는 1967년 12월부터 약 5년 동안 호이 안 일대에 주둔했다. 다낭과 호이 안의 중간에 대리석 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호이 안까지의 도로를 청룡부대가 건설했다.

한때 무역항으로 영광을 누렸고 또 전쟁의 상흔이 남은 호이 안은 이제 관광도시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곳저곳에서 전통 음악과 활기찬 춤이 어우러진 민속공연도 하고 밤이 되면 고가옥들에서 불을 밝힌 예쁜 등이 빛나는데, 마치 몇 백년 전의 흥청거리던 밤거리로 돌아온 것만 같다.

또 다른 호이 안의 매력은 값싼 옷을 마음껏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디자인이든 요구하면 하루 만에 뚝딱 만들어주는 옷집들이 매우 많아서 서양 여행자들 중에는 십수 벌씩 해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많이까지는 아니어도 1만∼2만원에 중국 혹은 베트남풍의 옷을 한두 벌씩 해 입는 것도 즐거운 문화체험일 것이다.

여행작가

◇왼쪽부터 고가를 개조해 만든 구시가지의 기념품가게, 호이 안의 옷가게, 대나무 조각

■여행 에피소드

똑같은 장소라도 어떤 분위기,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처음에 호이 안의 구시가지에 갔을 때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아름다운 도시를 수없이 보아온 사람으로서 약간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나중에 한가로운 마음으로 천천히 구시가지를 걷자 작은 아름다움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갖가지 표정의 탈, 예쁜 등,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이 그려진 그림, 창틀에 앉아 책을 펴고 아이에게 뭔가를 가르치고 있는 여인, 가게에 앉아 신문을 읽는 여종업원, 재봉질을 하는 여인, 고깔 모자인 ‘논라’를 쓰고 걸어가는 중년 여인 그리고 골목길을 스쳐 가는 바람 등 거리에 숨어 있던 아름다운 풍경들이 가슴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정적인 베트남 음악으로 시작되어 어느새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가 이어지더니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으로 바뀌었다. 맞은편에서 오던 서양 커플이 그 감미로운 음악에 취한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도 그 풍경과 음악에 도취하여 같은 길을 뱅뱅 돌았다.

이 도시의 진정한 매력을 맛보려면 급하면 안 된다. 마음을 한적하게 하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거리의 풍경은 그저 낡고 평범한 정물화처럼 다가올 뿐이다.

■여행정보

일단 다낭까지 간 후 그곳에서 시외버스, 여행자 버스, 택시, 세욤(오토바이) 중에서 선택하면 된다. 호이 안은 구경하는 시스템이 특이하다. 박물관도 여러 곳 있고 중국에서 온 화교들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향우회관도 여럿 있으며 오래된 집들도 여러 채가 있다.

또 전통 예술공연도 볼 수 있는데 이걸 개별적으로 표를 파는 것이 아니라, 박물관 중에서 하나, 향우회관 중에서 하나, 고가 중에서 하나, 예술 공연 중에서 하나, 그리고 기타 중에서 하나를 볼 수 있는 종합입장권을 사야 한다.

호이 안 거리에 흐르는 음악은 수요일, 토요일에만 나온다. 오전 8시에서 11시, 오후 2시에서 4시, 그리고 오후 6시에서 9시에 흘러나오니 이런 낭만을 맛보려면 그 시간에 맞추면 된다.

by 100명 2007. 4. 13. 12:40